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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매제도 존속을 둘러싼 피튀긴 전쟁의 증언 《염철론鹽鐵論》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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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8 09:11:19

전매제도 논쟁록 《염철론》 완역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부터 약 2100년 전인 중국 전한 소제昭帝 6년(기원전 81), 한나라 왕실에서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주제는 국가의 전매사업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폐기할 것인가.


부안 곰소염전



어사대부御史大夫를 필두로 한 행정관료 그룹은 소금과 철, 술을 국가가 전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각 군국郡國에서 천거된 현량賢良 및 문학文學그룹은 철폐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서 흔히 이 논쟁을 염철鹽鐵회의라 한다.


상인 출신의 어사대부인 상홍양桑弘羊은 말한다.


"이제 당신들은 이를 폐지하려 하는데, 이는 재정의 원천을 끊고 재원의 흐름을 막자 함이니, 국가와 백성 모두 재정이 고갈돼 궁핍함이 닥치게 될 것인즉, 비록 일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함이 아무리 좋다 한들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당신들'이라고 지칭된 현량과 문학들이 맞받아친다.


"불필요한 관청과 급하지 않은 공사와 유행 따라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들과 공이 없으면서도 국가의 녹을 받아 입고 먹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궁핍한 것이다"


이 대화록 하나만으로도 염철논쟁에서 서로 맞선 양측을 지탱하는 사상적 기반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사대부 그룹이 전매사업을 주축으로 국가에 의한 통제와 이를 통한 재정안정화를 기하려 한 소위 법가法家 계통이라면 그 반대편 문학과 현량은 대부분 유가 계통이었다.


제련로



그렇다면 하필 왜 이 시점에 이러한 논쟁이 일어났는가? 그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북방 유목민족 흉노였다.


흉노가 얼마나 중국에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새삼 말할 나위가 없으니, 소제의 바로 전황제인 무제는 53년을 헤아리는 긴 재위기간 내내 해외정벌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야욕의 그물에서 위만조선 또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진시황, 광개토왕, 장수왕, 근초고왕, 진흥왕 같은 이름난 정복군주들을 대단하게 여기는 이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위업이 매우 화려할지 몰라도, 그것은 엄청난 백성의 고혈을 발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무제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복사업을 위한 막대한 비용은 어디선가 마련해야 했는데, 여기에서 고안된 것이 바로 소금, 철 등의 전매사업이었다. 


그러니 염철논쟁에서 법가 계열은 당연히 전매제의 존속을 주장했고 문학과 현량은 백성의 고통을 들어 그것을 철폐하라고 맞섰던 것이다.


한데 이 논쟁은 급기야 양측의 비조鼻祖들에 대한 겨냥으로 이어진다. 유가가 한비자와 상앙을 호되게 비판한 데 맞서 법가는 공맹을 파상공세로 괴롭혔다.



어사대부는 공자를 겨냥해 말한다. "그 제자들이 그로 인해 변한 것이  없었고, 세상은 그로 인해 다스려지지도 않았으며,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는 국력이 점점 더 쇠약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문학과 현량은 "상앙은 무거운 형벌과 엄격한 법으로 진나라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에 진은 2대만에 망하고 말았다"고 맞받아친다.


전한시대 유학자인 환관桓官이 저술한 이러한 염철논쟁 회의록이자 동양학의 고전인 《염철론鹽鐵論》 전 60편이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와 같은 대학 이철호 강사의 공동작업을 통해 완역됐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재정지원을 했다. 소명출판. 428쪽. 2만6천원.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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