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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2005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씨와 한판 붙은 사건

by taeshik.kim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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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연합뉴스, '일제용어' 논란
기자명 권혜선 기자

입력 2005.04.28 12:08  수정 2005.04.28 13:16  댓글 0


연합 "김삼웅 관장 공부 더하라"에 기념관측 "감정적 표현, 기자자격 의심"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독립운동사 용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연구자대회에 앞서 배포한 발제문 '일제침략과 통치용어 실태'를 대해 27일 연합뉴스가 <독립기념관장의 거짓말? 혹은 무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논란을 빚고 있다. 

<독립기념관장의 거짓말? 혹은 무지?>를 쓴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가 김 관장의 글에서 지적한 사례는 크게 세 가지. 김 관장이 발제문에서 일제잔재 용어라고 지적한 22가지 사례 중 '민비', '민씨', '동·서·남대문' 이라는 표현 등은 일제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 기자는 우선 '민비(閔妃)'란 민씨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니 비칭의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 뒤, 조선시대 왕비를 가리켜 '~씨(氏)'라고 부른 사례가 부지기수로 많을 뿐 아니라 존칭의 의미도 있다고 반박했다. 또 동·서·남대문이라는 호칭은 일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5년(1396)에 명기돼 있으며, 오히려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과 같은 명칭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라 비판했다. 기사는 김 관장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주장을 한다면 역사조작이고,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차분히 공부해야 한다고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김용주 독립기념관 홍보팀장은 "(연합뉴스의 보도는) 역사적·문화적 고려 없이 단순논리로만 반박했다"며 반발했다. 김 팀장은 "국민적인 정서에 비추어보았을 때 황후를 '민씨'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 아니냐"며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이라는 명칭을 높이산 것은 그것에 담겨있는 인·의·예·지 등 유교사상을 지키자는 것이고, 이 유교사상은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를 관통했던 우리의 전통과 문화로서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무엇보다 '거짓말', '후레자식', '공부나 더 하라'는 등 감정적이고 비아냥 섞인 표현은 기자로서 자격이 의심스러운 부분"이라고 유감을 나타냈다. 

연합뉴스 김 기자는 이에 "인격적으로 모독을 느낄 수 있는 표현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라며 "(그러나) 기사에서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은 일제의 잔재로 알려진 상식 가운데 상당부분 잘못된 것이 있다는 점과 이에 대한 철저한 사실고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는 27일 오후 독립기념관 쪽 '반론보도문'도 게재한 상태다. (끝)

 

***

 

이걸 보면 참말로 내 기자생활은 전투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성질머리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그대로 발현하곤 한다. 

이른바 친일잔재 청산운동에서 한 상징과도 같은 김삼웅 씨 건은 이참에 덧붙여 두어야겠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2002년 서울신문 주필이 되어 이 신문을 대한매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을 끝낸 다음에는 2004년 11월 독립기념관관장에 취임해 활동 중이었다.

이 건 말고 여러 사안으로 그와 부닥쳤으니, 개중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독립기념관장 재직 시절에는 각종 학술대회를 기념관 이름으로 개최하면서, 본인이 개회사 하고 기조강연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 일을 참다참다 비판하고 나섰으니, 기관장이라는 자가 손님 불러다 놓고 기조강연까지 해 버리면 손님들을 꿔다논 보릿자루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으레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 권력까지 쥐면 안 된다는 신념 비스무리한 생각이 있다. 김삼웅씨는 나한테는 그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이른바 재야에 있으면서 전개한 친일잔재운동은 얼마든 환영하지만, 권력이 되어 그것을 전개하는 일은 몹시도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곡예타기 같았다. 

그가 친일잔재 증거라고 제시한 것들이야 재야에 있을 때는 그런갑다 하고는 말지만, 권력이 되어 전개하는 그것들은 호된 시련이 불가피했으며, 나는 그 호된 시련을 안겨줬다. 

그가 제시한 잔재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잘못된 신념 혹은 정보에 따라 주입한 오류투성이었으니, 권력이 된 그가 휘두르는 오류 행진을 나는 더는 눈뜨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연이은 비판에 김씨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개중 하나가 저 보도에서 말하는 저 사건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인 2008년 3월 25일, 전임 정부 출신이라 해서 각종 압력을 받고는 자진사퇴 형식으로 기념관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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