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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풍납토성 지켜낸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미디어오늘 2000. 05. 25)

by taeshik.kim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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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지켜낸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미디어오늘

“꽃삽이 불도저를 이겼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문화재 보존이라는 화두가 개발의 효용보다 의미있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연합뉴스 김태식기자의 말이다. 그는 풍납토성을 무려 1년이 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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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지켜낸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조현호 기자 입력 2000.05.25 00:00
 
꽃삽이 불도저 이겼다,´토성´기사만 100여건
부분이나마 문화재 보존지역지정 ‘성공’
“꽃삽이 불도저를 이겼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문화재 보존이라는 화두가 개발의 효용보다 의미있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연합뉴스 김태식기자의 말이다. 그는 풍납토성을 무려 1년이 넘도록 집요하게 추적보도해 온 근래에 보기 드문 기자다. 

그는 지난 98년 11월 문화부에 배치된 이래 풍납토성 관련기사만 무려 100여건 이상 출고해 풍납토성이 위치한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 부분적으로라도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지정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이토록 풍납토성에 열정을 가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문화재를 처음 보고 난 감회에서였다. 
 

사진은 2008. 5. 7 한신대박물관 조사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설명회에서 한 장면.



그는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유물이 풍납토성에서 발견됐다”며 “천평 남짓한 그리 크지 않은 공간임에 비해 많은 유물이 발견된 건 이곳이 그 당시에 대도시였다는 얘기고 이때부터 이곳이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라 판단해 보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경험도 그의 집요한 의지의 밑바탕이 됐다. 그는 “대학에서 전공과 무관한 한학을 독학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해 애정을 가지게 됐다”면서 “삼국사기를 달달 욀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취재를 하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주일에 고서 2∼3권을 볼 정도로 자료를 엄청나게 수집 검토했다. 취재과정에서 어려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솔직히 문화재 보존이라는 당위와 주민들의 재산상의 이해관계 중 균형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만약 사적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은 삽질 하나를 하는데도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주변의 땅값이 폭락하는 등의 피해를 보는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2000년 5월 13일은 주말인 토요일. 풍납토성 경당지구는 무단 파괴됐다. 흰 잠바가 김태식.

 

그는 “솔직히 문화재 보존의 입장에 섰지만 주민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취재에 착수하면서부터는 현장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4월 10회 분량의 특집기사를 내보냈으나 “계속 쓰면 포크레인으로 토성을 뭉개겠다”는 주민의 압력까지 듣게 되자 보도를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후 다시 취재에 들어갔을 땐 현장에 왔다갔다하던 인부나 정부관계자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거나 옆 건물 위층까지 올라가 카메라 줌을 동원해 가까스로 유물들을 확인할 정도로 취재의 고충을 감수했다. 

특히 주민들이 연합뉴스라는 언론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가 기자들 중 블랙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오를 정도로 원성이 드셌다.

김기자는 기사를 통해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기존 학설에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형님성은 풍납토성이고 동생성은 몽촌토성이라는 개인적 학설까지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후에 개인적으로 이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취재과정에서 학자들을 너무 많이 공격한 나머지 받아줄 학교가 없을 것 같고 주민들의 원성까지 사 앞으로 취재 자체가 힘들 것 같다고. 

김태식기자는 “정부당국에서 주민들을 위한 효과적인 보상대책 마련에 적극성을 보여줬으면 한다”며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끝) 

 
*** 
 
이 풍납토성이야말로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한국언론사, 특히 문화재 언론사에서 흔적이 남는다면, 김태식이라는 이름을 각인한 훈장이다. 

이걸로 많이 울거 먹었다. 저걸 훈장처럼 달고다닌 거 맞다. 인정한다. 

지금은 김태식이라는 이름 혹은 흔적이 풍납토성에서는 지워졌겠지만, 그 현장 혹은 주민사회에서는 퇴치해야 할 거대한 악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겁이 없었다. 그만큼 어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물론 풍납토성을 어찌 나 혼자 지켜냈겠는가? 

그럼에도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랬듯이, 김태식 없었으면 저 풍납토성 지키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이 하나만큼은 지금도 자신있게 말한다.

그만큼 그때 나는 미쳤었다. 

그걸 때려부수거나 망친 이들로 주민이나 건설사들을 지목하겠지만 일정부분 타당하겠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그들이 아무리 그리 요구해도 그 결정권을 쥔 쪽은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 그리고 관련 학회와 그 종사자들이다.

그 보존을 결정한 이는 저들이나 지키지 못한 것도 결국 저들이었다.

따라서 나는 당시 쌍방향 전투를 벌였다.

가장 실망한 데가 실은 고고학 관련 단체들과 그 종사자들이었다. 누구 하나 지키겠다 나선 이 없었고 풍납토성이 왕성이냐고 삿대질해댄 그들이다.

심지어 이곳을 파제낀 어떤 고고학도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풍납토성에선 암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보고서도 썼다. 그들이 풍납을 망친 것이다.

그랬던 친구들이 이십년이 흘러 어느 누구도 반성문 하나 없이 풍납이 백제왕성이라 떠드는 꼴을 보면 구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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