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경주 꺾다리 학예직 이채경이 문화재과장질할 때 덜커덩 저지른 경주 황남동 120호분 발굴조사는 배보다 커진 배꼽의 전형이라.
무덤 하나 보고 파제꼈는데,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잔챙이 무덤이 쏟아졌으니, 바글바글 무덤 밭이었다.
120호분은 전형하는 신라시대 중고기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이었고, 그 귀퉁이 사방에서 천지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무덤들이 드러났으니,
조사단이 황남동 제1호 목곽묘라 이름붙인 저 무덤도 훗날 120호분이라는 무덤이 들어서면서 그 일부 구역을 파괴한 그 이전 무덤이다.
저 도면이 무덤 내부 대강 배치 양상이라 보다시피 무덤 주인공이 잠자는 공간(이를 고고학에서는 주곽主槨이라 부른다)이 있고, 화면 기준 아래쪽으로 껴묻거리를 집중으로 넣는 창고(이를 부곽副槨이라 한다)이 위치한다.
저걸 거꾸로 180도를 돌리면?
다음과 같이 된다.

그래서 무슨무슨 스타일 양식 만들기 좋아하는 한국과 일본고고학이라, 저네들은 T자 모양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저 주곽과 부곽을 설치하는 양상은 아주 다양해서 나란히 세우기도 한다.
저 도판을 자세히 보면 껴묻거리 창고칸에도 한 사람이 더 누운 모습이 보인다.
조사단에서는 저를 순장자라 했다.
무덤 주인공이 죽었을 때 저승까지 가서도 시다바리 하라고 죽여서 넣어주는 사람, 이런 양태를 순장이라 하고, 영어로 표현할 때는 흔히 sacrifial human 정도로 표현하니, 심청이 같은 인신공희(인신공양이라도고 한다) 일종이다.
한데 유의할 점은 앞 도면이건 저걸 180도 돌린 다음 도판이건 우리한테 익숙한 동서남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 무덤을 만들 무렵 신라 가야 문화권은 죽은 사람이 거개, 거의 예외없이 죽은 사람(물론 무덤 주인공 기준이다) 머리가 동쪽을 향한다.
그러니 첫번째 도면 기준으로 위쪽이 동쪽이다.
이를 우리한테 익숙한 동서방향, 곧 위가 북쪽, 아래가 남쪽인 방향으로 놓아본다.
곧 다음 도면이다.

저 무덤 형식을 목곽묘라 하는 까닭은 시신을 목관에 안치하지만, 그 목관 테두리에 별도 더 넓은 관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관을 감싼 또 하나의 관을 곽槨이라 하며, 이런 곽이 나무 형태로 확인되는 무덤을 목곽묘라 한다.
순장자는 불쌍하게도 목관이건 목곽이건 만들어주지 않고 그냥 던져버렸다. 불쌍한 분이다.
저 왼편 껴묻거리 창고 역시 나무상자를 안치했다.
문제는 이 상자건 목관이건 목곽이건 다 썩어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강 그 흔적 보고 만들어넣어야 한다.
견준다면 사과상자인데 사과만 남고 박스는 없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어디가 머리이고 발치인지는 인골이 완전히 나오면 가장 좋겠지만, 어차피 산 사람이랑 똑같아서 껴묻거리 발견되는 모습을 보면 개돼지도 안다.
예컨대 귀걸이. 발걸이가 아닌 이상 얼굴 머리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칼? 칼 놓인 방향으로도 어디가 머리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설마 죽은 사람이라고 칼을 거꾸로 세우겠는가? 당연히 자루 쪽이 향하는 데가 머리 방향 아니겠는가?
귀걸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저때도 대개 쌍이다. 그래서 귀걸이 발견 지점 가운데가 안면이 있는 자리다.
한데 저 순장자의 경우는 차별이 일어나, 귀걸이는 해주기는 했는데, 대강 말아 만든 금귀걸이 한 쪽만 걸어주었다.
시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반듯한 상태로 누웠을까?
당연히 그러겠지 하겠지만 천만에.
이것도 문화권 별로 엄청 다양해서 심지어 얼굴을 바닥으로 쳐박고 묻힌 일도 많다. 난
하늘 보기 부끄러워 했을 수도 있고, 난 이승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다 해서 그리했을 수도 있다.
저 경우 무덤 주인공이 반드시 하늘을 보고 누운 것만은 거의 확실한데, 순장자는 어떤 상태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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