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표기 수단이 공식 발명되기는 1443년, 세종 25년이며, 그것이 공식 반시되기는 3년 뒤인 1446년, 세종 28년이다.
이 시점이 왜 중요한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서 저 사업을 밀어부친 세종 이도는 반시 기준으로 불과 4년 뒤인 1450년에 훅 가버리기 때문이다.
권력층 어느 누구도 흔쾌히 찬성했다고는 볼 수 없는(실제 이를 열렬히 찬성한 사람은 쉬 눈에 띠지 않는다.) 이런 사업은 그것을 밀어부친 최고 권력자가 훅 가버리면 이내 없던 일로 흐지부지하고 만다.
이 점에서 저 훈민정음은 놀랍기 짝이 없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저 결정적인 핸디캡, 곧 그 절대의 사업추진자가 훅 가버렸음에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더 요상한 점은 반시와 더불어 국가적 사업으로 세종이 그 실현을 밀어부쳤거니와, 이는 당연히 그 사업을 밀어부친 최고권력자가 살아있는 상태였기에 가능했지만 그런 그가 죽으면 상황은 반전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훈민정음은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훈민정음이 유별나게 대접받아서, 곧 권력층의 열렬한 비호 아래 살아남았다는 흔적은 쉬 간취되지도 않는다.
이 점이 미스터리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왜 훈민정음은 살아남았을까?
나는 세종과 함께 저 사업을 밀어부친 권력층이 차기 권력층을 그대로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종을 뒤이은 문종과 그 손자 단종시대는 워낙 짧았고 무엇보다 정변으로 내란이 점철했거니와, 세종 말년 저 사업을 밀어부칠 때 저 사업에 적극으로 동참한 이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 권력 창출의 일등공신인 신숙주라 본다.
수양대군은 아버지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직접 지었고,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를 밀어부친 실무진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이 사업을 주도한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차지 정권을 장악한 일로 훈민정음이 살아남은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서 더 중요한 관건은 저들과 세종의 관계다.
세종이 참말로 다행인 점은 그 자신이 후계로 지목한 문종과 손자 단종은 훅 갔지만, 이 후계구도는 누구도 그 권위에 토를 달 수 없는 정통 종법에 따른 조치였거니와, 이 과정에서 그 위협이 된다 해서 세종이 수양대군이나 신숙주를 내친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외려 세종은 저들을 적극으로 활용했다.
물론 이런 적극적인 활용이 훗날 쿠데타를 부르는 결정적인 힘이 되기는 하지만, 수양대군이며 신숙주로서는 세종한테 원한을 품을 일은 없었다는 사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대하다고 본다.
그런 그들이 권력을 장악했으니, 훈민정음 창제는 그 절대하는 공이 세종에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표기수단으로 정착하는데는 세조 시대를 결코 망각할 수 없다고 본다.
세조시대 간경도감 설치와 이를 통한 활발한 불경 언해 사업을 훈민정음이 비록 지배층에서는 여전히 부수하는 표기 수단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살아남는 절대하는 바탕을 마련한다.
이런 사업은 성종시대로도 이어져 분류공부시언해라는 당시로서는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할 위대한 번역사업으로 꽃을 피우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요컨대 훈민정음은 세조와 신숙주 같은 절대 권력층의 절대 비호 아래 살아남았으니, 저런 과정들을 볼 적에 나는 훈민정음 창제보다 그것이 살아남은 일을 기적으로 본다.
그런 훈민정음이 저렇게 살아남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 기간에 이내 여성 팬덤을 형성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지배층 중심이기는 하나, 훈민정음으로서는 의도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 여성들은 실상 한문은 까막눈이었지만, 교양은 있었다는 사실 역시 대서특필해야 한다.
한문은 천자문 정도만 소화할 줄 아는 그 시대 여성들한테 훈민정음은 교양이 있고 싶어하나 문자 까막눈인 저네 지배하는 여성 권력층을 매섭게 파고 들었다.
훈민정음 이전 저 교양 있는 여성지배층은 입은 있으나 그것을 표출한 매체가 말밖에는 없었다.
한문을 알아야지?
그 절대 여성 지배층 절대 다수가 실은 한문 까막눈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이단아가 가끔 나오기는 했으나 그들은 한문을 몰랐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도 몰랐다.
그런 그들한테 훈민정음 출현은 축복이었고 단비였다.
그네가 비로소 그네들 입을 통해 속내를 드러내고 그것을 정전화하는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그 통로였다.
이렇게 해서 여성 팬덤을 형성한 언문은 그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니 이 어찌 기적이라 하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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