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주려 있던 나는 대학 진학과 더불어 게걸스레 채치우기 시작했으니 연전에 말한 대로 내가 그 생활을 시작한 부천 송내 막내 누님 집에는 내가 뚜렷이 기억하기로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저명한 레마르크 전집과 삼포능자(미우라 아야코) 전집, 그리고 이상하지만 괴테 전집 세 종류가 있었다.
단칸방 전세인 누님 집 책이라고는 그 뿐이었으니 괴테 전집 말고는 다 뽀갰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요상한 점이 1986년 그때 출판 서지사항을 기억할 순 없으나 그 꽤죄죄한 몰골을 보면 7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저들 전집이 나왔음은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먹고 살 궁리도 막막한 그때 저런 전집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 어느 헌책방에서 노닥거리다 그 무렵 다른 전집 몇 종에 눈에 띈다.
첫째 모파상 전집. 보다시피 1970년에 그의 전 작품이 모조리 한글로 번역되어 선보였으니 더 놀라운 점은 그 거듭한 판본이라 그해 2월 23일 초판이 다음날 바로 재판을 찍었다 하고 5월에 벌써 제4판을 소비하고 있다.
뭔가 야로 냄새가 나긴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점은 저때 이미 모파상 전집을 소비하는 시장이 한국에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둘째가 내가 기억하는 괴테 전집이다. 이 역시 뭔가 야로 냄새가 나긴 하나 1968년 3월에 초판을 찍고 그 담달에 재판에 들어간다.
내가 부천 누님 집에서 만난 괴테 전집이 바로 저것이다.
셋째 헤밍웨이 전집이다. 이건 1967년 3월에 초판이 나오고 그해 8월 25일에 벌써 제7판을 소비하고 있다.
해방 당시 전국민 90프로 95프로가 까막눈인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불과 20년 만에 모파상 괴테 헤밍웨이를 전집으로 씹어돌리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이 일본어 중역이건 뭐건 저 힘은 도대체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막연히 이야기하는 교육열로만은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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