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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이종철 선생이 증언한 70년대 한국-덴마크 문화교류사 한 단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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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시청사

 

근자 문화계 지인 두엇이 각종 그럴 듯한 핑계 달아 국민세금으로 덴마크를 다녀왔니 혹은 와 보니 와! 별천지니 하는 자랑질을 보고는 나라고 용심이 나지 않을 수 있겠나? 

나 역시 아주아주 먼 옛날 국민세금 지원으로 덴마크, 더욱 정확히는 그 왕경 코페하겐을 꼴랑 한 나절 다녀오고는 주구장창 써먹은 적이 있었으니 요새야 영란법이니 해서 그런 지원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곤란한 시대로 접어든 아승끼 전세 겁의 일이었다. 

덴마크는 대한민국 문화재 교류사에서 특기할 만한 인연이 있으니, 개중 내가 증언으로 채취한 그 한 단면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당시 나로서는 이 간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얘기는 다른 데서 잠깐 논급한 적도 있으니, 오늘 아침 그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거론해야 할 이가 이종철 선생이니, 민속계에서는 전설과 같은 인물로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고는 것도 부족해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학교, 현 한국전통대학 총장이 되어서는 이 학교를 육사로 만드니마니 하는 논란이 극심했던 인물이라, 것도 부족해 나중에는 한성백제박물관 추진반장인지도 역임하시었다. 

선생은 1961년 개설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난중에 이 학과는 고고미술사학과와 인류학과로 농가졌으니, 뭐 먹을 게 있다고 저걸 쪼갠단 말인가) 제2회 입학생이라, 그러니깐 1962년에 들어갔으니, 학과라 해 봐야 교수라고는 꼴랑 한 명이었으니 삼불암이라는 호를 쓴 김원룡이었다.   

꼴랑 열댓명하는 2회 입학 동기생으로 조유전 지건길 선생이 있으니, 1회가 김병모 안휘준 정영화 선생 등등이 주로 교수로 빠진 데 견주어 2회는 야지리 관으로 빠져 공무원 생활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데 특징이 있거니와, 또 이 양반들은 생명이 아주 질겨서 60세 공무원 퇴직을 하고서도 아주 오래도록 현직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펜하겐 역

 

암튼 각설하고 저 2회 동기생 셋은 60년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야지리 문화재연구실에서 시작했다는 데 공통점 또한 있으니, 그런 까닭에 저들의 진짜 스승은 김원룡보다는 창산 김정기 박사였다. 문화재관리국 산하 저 문화재연구실은 훗날 야금야금 덩치를 키워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를 거쳐 국립문화재연구원이라는 야시시한 간판을 내건 국책 기관이라, 이 이야기를 하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 세 분은 문화재연구실 소속이었다. 저 셋 중 지건길 선생이 가장 먼저 잽싸게 연구관 되겠다고 국립박물관으로 튀었다. 

얘기가 옆길로 많이 샜지만, 찌께다시가 때론 메인디시보다 나은 법이라, 각설하고 저 덴마크 질에 신경질이 난 김에 그 옛날 이종철 선생한테 들은 덴마크 일화가 있어 새삼 선생께 전화를 넣어 한국과 덴마크 문화교류사 한 단면을 증언 청취해 기록해 두고자 한다. 

민속학도인 선생이 문화재연구실 선배이자 고건축학도인 장경호 선생과 덴마크로 향한 때가 1979년 3월이라 한다. 애초에는 2월이라 말했다가 전화 통화하는 중에 관련 자료를 뒤졌는지 3월이라 교정한다. 그러니 때로 보면 유신정권 말기였다. 

 

티볼리 입구

 

둘은 어찌해서 느닷없이 저때 덴마크로 갔던가? 선생이 이르기를 당시 한국-덴마크문화교류협정이 체결되고 그에 따른 인적 교류가 있었다 하거니와, 그 일환으로 문화재 분야에서도 두 선생이 시험을 통해 선발되어 저짝으로 갔단다. 당시 도서관이니 하는 기관에서도 덴마크로 간 이가 있었단다. 관련 제반 비용을 댄 데가 덴마크 문부성이라 이 선생이 표현하는데, 어째 일본 색채가 나는 이름이라, 요샛말로 덴마크 문화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체류기간은 장 선생이 4개월이었고, 이 선생이 8개월이라, 그해 10월에 한국으로 복귀했단다.  이 선생은 국립민족학박물관이라는 데 적을 두었고, 장 선생은 덴마크 왕립건축연구소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이들 기관은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정확한 이름은 내가 찾아보지 않았다. 

선생에 의하면 덴마크가 당시 문화재 분야에서는 앞서가는 데라 각광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어째 본인이 그쪽으로 가서 생활했으니 하는 말 같고, 이 비슷한 시기에 문화재연구실 또 다른 동료이자 선배인 건축학도 김동현 선생은 이탈리아에서 이코모스 회의인가에 참석한 일이 있어, 그때 부러 두 사람을 만난다고 코펜하겐을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한다. 

 

칼즈버그 박물관이다.

 

덴마크 체류 당시 저와 같은 한국사람들한테 런 베어 인가로 기억하는 덴마크 사람이 도움을 많이 주었다는데, 당시 그는 덴마크 사람으로서 덴마크 한국총영사로 일했다 한다. 그가 아마도 코펜하겐 같은데, 5층짜리 건물 소유주라 이 건물이 바로 저와 같은 가낭뱅이 한국사람들한테 숙소로 제공했다고 한다. 그가 레고랜드 회사를 운영자라는 말을 하는데, 이건 확인해 봐야겠다. 레고랜드가 덴마크 기반 회사니 신빙성은 상당하다. 이 건물에는 다른 기관에서 나온 한국사람들도 같이 머물렀다 한다. 

저들 기관에서 저들은 각기 자신의 주특기에 맞춰 이 선생은 민속학, 장 선생은 건축학 관련 견문을 넓혔다. 

저 무렵 왜 덴마크랑 한국이 저와 같은 협정을 했을까? 이건 내가 추가로 관련 자료를 뒤지지 않아 자신은 없으며, 순전히 감에 의지해서 분석하자면 당시 덴마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국가상 중 하나였으니, 특히 내 세대만 해도 잘 기억하는 달가스니 그룬트비니 하는 덴마크 산림운동가들이 신으로 추앙되던 시절이었다. 

 

Enrico Mylius Dalgas (1828~1894). 그는 엔지니어다. 유틀란트반도 개조 운동을 벌였다.

 

헐벗은 국토를 산림으로 가꾸었다는 달가스랑 그룬트비. 비단 덴마크만이 아니라 그 이웃 서독이니 해서 유럽은 박정희시대가 지향하는 이상 중 하나였다. 흔히 미국 중심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시대 국토가 온통 민둥산이요 산업이라 해봐야 보잘 것 없은 한국이 특히 전자와 관련해 봉착한 지상과제가 산림녹화와 낙농국가 확립이었으니, 바로 이 시절 덴마크와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과 스위스의 낙농이 주목받던 시기였다. 

아마도 저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한국과 덴마크가 문화교류협정까지 하지 않았나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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