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치 혀로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서희는 이미 앞서 봤듯이 곧바로 소손녕과의 밀약에 따라 여진 몰아내기에 나섰다.
그 자신 문관이지만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먼저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 두 강 구간 개척에 나서 여진을 공략했다.
고려로서는 다행인 점이 당시 여진은 거란에 복속한 상태로 아직 중앙집권화한 권력이 출현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부족별로 할거한 상태라, 응집력이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는 거란에서 그 개척을 나몰라라 한 까닭에 저항은 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몇년 사이에 순식간에 8개 성을 쌓으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사민까지 해서 둔전을 기반으로 확실히 이곳은 우리 땅이라는 발판을 만들어 나갔다.
그런 점에서 서희는 최윤덕과 김종서의 직접 선배였다.
한데 그의 꿈은 훨씬 더 담대했다.
앞서 본대로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하는 과정에서 안북부에서 거란 동경에 이르는 수백리 구간은 여진이 점령한 까닭에 그들에 막혀 거란에 직접 조공을 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댔다.
그의 이른바 강동육주는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데 우리가 유의할 점은 이른바 강동육주는 그 자신이 말한 조공로 중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압록강 넘어 거란 동경에 이르는 구간은 어찌되는가?
사가들이 하나같이 놓친 대목이 그것이다. 서희는 놀랍게도 압록강을 넘어 요동반도까지 쳐서 그곳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서희가 담판을 하고 돌아오자 성종은) 시중 박양유로 하여금 예폐사禮幣使가 되어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여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조정에 들어가 뵙고 통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겨우 강 안쪽 만을 수복하였으니, 강 바깥쪽까지 점령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의 예를 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될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보내었다.
그는 야망이 컸다.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지만 훗날 요동을 정벌하려 한 이성계 정도전처럼 그 역시 요동을 정벌하려 했다.
그 꿈이 하도 담대해서 고려가 당시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요동까지 정벌했더라면 역사는 어땠을까?
나아가 여진은 그렇다면 이 사태를 어찌 바라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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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고려거란전쟁] (4) 버선발로 뛰어나가 서희를 맞은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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