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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동부전선 이상없다. 서부전선이 문제다, 백제 구원 1만 명을 보낸 신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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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구려가 집중적으로 부닥친 서부전선. 이 쪽을 두고서 피말리는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광개토-장수왕 시대를 맞은 고구려가 백제를 향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신라 역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무렵 고구려는 이미 남한강 유역으로 깊숙히 소백산맥까지 치고 들어온 형국이라, 한반도 중남부 일대는 삼국이 국경을 대치하는 시대였다. 

신라와 고구려는 크게 보아 양쪽에서 대치했다. 

하나는 동부전선이고 다른 하나가 서부전선이었다.

지금의 강원도 삼척과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 전선이라, 고구려는 동해안에 직접 진출한 적은 없기에 이 지역 연고권이 있으며, 그쪽을 무대로 삼는 말갈[물길]을 부용하면서 그들을 앞세웠다. 

삼국간 지형을 바꾼 475년 전쟁, 곧 고구려에 의한 백제 한성 정벌에서 우리는 흔히 신라의 움직임을 간과하는데, 이 전쟁은 신라도 휘말린 국제전쟁이었다.

미쳐 신라군이 손을 쓰기 전에 백제가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리 보는 듯하지만 내가 계속 강조하지만 이 전쟁은 삼국간 정치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백제는 망했다. 그렇게 망한 백제가 일어난 힘은 놀랍게도 신라였다.

신라가 사직을 일으켜 세웠다. 왜 신라가 이리했겠는가?

백제가 살아나야 고구려를 막아주기 때문이었다. 신라로서는 백제가 고구려의 방탄막이였다. 

고구려 대군이 침략해 한성을 위협한다는 급보를 접한 신라는 구원병을 자그마치 1만 명이나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 정책 결정 과정이 무척이나 갑론을박을 불러냈다고 보는데, 왜 이렇게 신라는 많은 병력을 보냈을까?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양쪽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동부 전선도 위험하고, 죽령 너머 남한강 상류까지 치고 들어온 고구려를 더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관건이 나는 신라군의 이동경로라 보는데, 도대체 신라 구원병 1만명은 어디에서 차출해서 어느 경로 가서 한성에 닿았을까? 이것이 몹시도 궁금하나, 이를 풀 만한 단서가 현재의 나로선 없다. 

신라는 왜 고구려랑 한 판을 뜨려 했을까? 우리가 이에서 생각할 지점은 이미 고구려랑 곳곳에서 붙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장 동부 전선만 해도 그랬다. 저 전쟁 발발 7년 전인 468년, 자비마립간 11년에는 고구려는 말갈 군사 1만 명을 앞세워 실직성을 공격했다.

동해안에서 1만명? 이 심각성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그냥 국지전 규모로만 생각할 수 없다.

명운을 건 전쟁이었다.

나는 이 전쟁이 말갈 의도 혹은 주도였다 보거니와, 말갈은 자기네로서는 고토인 실직성을 빼앗아야 했고, 무엇보다 이런 상태로 계속 신라를 방치하다가는 안방까지 내어준다는 불안감이 컸다고 본다. 

이 불안은 곧 고구려의 불안이기도 했다. 저 시대까지도 신라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광범위한데, 천만에, 신라의 부상은 무서웠다. 

동해안을 따라 신라는 이미 함경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혹자는 진흥왕 시대를 이야기하나 택도 없는 소리다. 신라는 이미 내물왕 시대에 동해안 일대는 함경도 일대까지 다 먹어버린 상태였다. 

저 실직성 공략이 나는 보병 주도로 펼쳐졌다고 보지 않는다. 말갈은 배를 타고 남하했다. 

고구려와 말갈의 동부전선 공습은 멈추지 아니해서 저에서 다시 2년이 지난 뒤인 470년, 자비마립간 13년에 동해안 지대를 내습한다.

이런 대치 혹은 대결 국면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고구려가 3만 대군을 보내 백제 왕도 한성을 들이치자, 이 사태는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신라는 1만명을 보내게 된다. 여차하면 고구려와 전면 대결을 벌릴 판이었다. 

이때 이렇게 신라가 생각한 까닭은 자기네 구원병이냐 1만이지만, 백제 주력군이 어느 정도 살아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이 협력하면 내부를 방어하는 백제와 외부에서 들이치는 신라군이 합세하면 고구려 공세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라는 이미 그 직전 곳곳에서 고구려와 맞붙은 상태라 상대 전력 또한 꽤 간파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결단한 주축이 나는 벌지 덕지라 보는데 이들의 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승리를 구가한 전쟁 영웅들이었다

아쉽게도 이 대목이 보이지 않는다.

475년 전쟁은 실은 신라의 전쟁이기도 했다. 이것이 훗날 이 상태로 계속 방치하다간 언젠가는 당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 근간하는 위험요소인 고구려를 아예 씨를 말리자는 방향으로 틀게 된다. 

이 판단이 섰을 때, 신라는 거칠부를 필두로 8장군을 내세운 거병을 일으켜 마침내 죽령을 넘어 대대적인 대 고구려 전쟁에 나서게 되니, 진흥왕 시대에 전개한 이 신라의 전쟁은 실은 475년 장수왕에 의한 백제 정벌전의 오마주였다. 

장수왕은 본때만 보여주고, 개로왕 목을 치고 전리품을 챙기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신라는 달랐다.

그걸로는 훗날 결국 후환이 되고 만다 해서 땅과 사람을 차지한 것이다. 

이 사람에는 인종청소도 포함됐다. 반란기미가 있는 뼈속 깊은 고구려인은 씨를 말리는 대신, 남쪽에서 바리바리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

이른바 사민정책을 동반한 것이다.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이보다 약 80년 전, 장수왕은 왜 그리 하지 않았을까를 물어야 한다.

나는 사민할 인구가 부족해서라고 본다.

그러니 본때만 보여주고선 다시 후퇴한 것이다.

이것이 신라와 고구려의 차이였다고 본다.

인구 문제는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며 이는 그만큼 신라가 내부에서 영토를 개척하고 그쪽으로 사민을 해야 할 만큼 내부가 인구폭증에 시달렸다는 증좌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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