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발 선비 왕조인 북위北魏 정사로 기획한 위서魏書에는 이역 열전 중 하나로 고구려가 채택되어 그 역사를 북위 왕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했으니 그에 얽힌 일화 중 하나로 다음을 적기한다.
세조世祖 때에 쇠釗의 증손 련璉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安東을 보내서 표를 올리고 방물[특산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우리 황제의 존함[국휘國諱]를 물었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詔命으로 제계帝系[북위 황실 족보]의 이름 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그 답방 형식으로 고구려에] 보내서 련璉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 중랑장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都篤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배수拜授했다.
이어 이 위서 고구려 열전에는 이오가 돌아와 고구려 사정을 보고한 내용을 추려 적었으니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敖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 여러 곳을 방문하고선 이렇게 아뢰었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책성栅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작은 바다小海에 닿으며,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다다른다. 민소民戶 숫자는 이전 위魏나라[삼국시대 위나라] 때보다 세 배가 많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여리이며 남북은 1천여리가 된다.
백성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및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토질土質이 척박해 양잠과 농업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즐겨, 밤이면 남녀가 떼지어 어울려 노는데, 귀천의 구별은 없었지만 정결함을 좋아했다. 그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했다.
이 사신 파견이 위서 본사와 삼국사기 장수왕본기에서 적기됐으니, 이를 따르면 저 사신 왕래 사건은 서기 435년, 장수왕 23년에 있었던 일이다.
고구려가 먼저 북위에 사신을 보낸 시점이 여름 6월이라 하니, 답방은 그보다 늦은 시점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저런 기록에서는 하나로 퉁치고 만다.
고구려 동해안 진출과 관련해 우리가 저에서 주목할 대목 두 지점 정도가 되는데 첫째 북위가 장수왕을 책봉하면서 바다와 관련해서는 '요해 제군사遼海諸軍事'라 해서 요동만을 적기했을 뿐이며 동해 운운하는 대목은 털끝만큼도 없다.
나아가 그 사신 보고서에서도 그 영역과 관련해 동서남북 중에서도 유독 동쪽이 이상해서 책성만 덩그러니 나온다.
바다가 없다. 우연히 빠졌는가?
첫만에! 나머지 방향은 그 끝을 적었는데 동쪽 변경에서 바다 쪽을 적지 않은 것은 지들도 몰랐기 때문이다.
고구려도 몰랐다.
왜? 그 동쪽은 지금의 개마고원을 비롯한 험준한 고원지대가 펼쳐지고 그곳은 말갈 땅이라, 지금처럼 철사줄로 국경선을 정한 것이 아니라 zone으로 넘나듦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기록에서도 다 마찬가지라, 고구려가 동해안, 지금의 함경도 해변으로 진출했다는 흔적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이 없는 것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런 흔적 증거가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왜 고구려가 함경도 해변까지 진출했다고 개사기를 치느냐 이 말이다.
그리고 시대별 넘나듦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 영역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 고구려 영역 문제도 이제는 제대로 짚어야 한다.
광대한 만주벌판? 이 신화도 두들겨 부수어야 한다.
그 국력을 이야기할 때는 첫때 인구, 둘째 면적, 셋째 토지생산성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단 한 놈도 의심하지 않은 고구려 동해안 문제, 신라는 고구려를 뒤꼭지서 겨누었다
https://historylibrary.net/m/entry/goguryeo-east
단 한 놈도 의심하지 않은 고구려 동해안 문제, 신라는 고구려를 뒤꼭지서 겨누었다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중 하나가 고구려 동해안 진출 관련이다.계속 이야기하듯이 고구려는 동해안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물론 이 동해안도 구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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