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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Naju Bokamri Tombs Museum을 고발한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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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복암리고분전시관을 Naju Bokamri Tombs Museum이라 영문 표기하는데, 일단 제목에서는 이 현지 표기를 중시하지만, 이는 콩글리시라 Naju Bokamri Tomb Museum이라 하면 된다. 이런 콩글리시가 영문으로 정착한 다른 유사 사례로는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도 그러해서 Daeseong-dong Tombs Museum이라 표기할 것이다. 복천동고분전시관도 아마 이런 식으로 쓴 게 아닐까 한다. 

 

한국의 삼국시대는 Three Kingdom Period인데 이걸 김원룡을 비롯한 초창기시대 영어미숙자들이 Three Kingdoms Period와 같은 콩글리시로 쓰는 바람에 이상해졌다. 

 

 

복암리고분전시관

 

 

한국에서 전시관은 박물관 미술관에 견주어 그보다는 격이 어쩐지 한 단계 낮은 말로 통용한다.

하지만 영어로 옮기면 같은 뮤지엄이니 그것이 어찌하여 sub-museum이 될 것인가?

그 목적 중에 교육 기능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현장 현장을 외치는 까닭은 그것이 꼭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옮겨지고 재생산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왜곡을 빚을 우려 때문이다.

 

복암리고분전시관



여기 나주 복암리 전시관이 있다. 국비와 지방비를 투하해 근자 나주 복암리 고분군 인근에 문을 연 신생 박물관이다. 운영 방식이 독특해 민간에 위탁해 동신대 산학협력단에서 나주시 돈을 받아 운영한다.

계약기간 3년이요 올해 지원 예산은 3억5천인가로 책정됐다. 인건비에 시설관리비 빼면 사업비는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복암리고분전시관



이 소식을 들었을때 나는 이 방식이 성공해도 문제요 실패해도 문제라 했다. 후자야 달리 설명이 필요없고 전자는 그 시금석이 되어 향후 전국적인 문화기관 운영 모범이 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복암리고분전시관



하지만 나는 이 복암리전시관이 성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고학 박물관이 썩 만족할 만한 돈을 버는 곳은 아니어도 가서 보고 배우고, 더구나 그 배움이 자발성에서 우러나오는 곳이어야 한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복암리고분전시관



배움 혹은 교육이라면 부지하고 불식하는 사이 그 계층을 갈라 고고학도가 선생이 되고 기타 우수마발, 특히나 초중등 학생들은 그네가 주입하고 주물하는 교육을 대가리에 쑤셔박아야 한다는 경계가 있다. 

 

복암리고분전시관



복암리전시관은 이런 통념 구분에 대한 반란이다. 이는 누구나를 피교육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피교육대상엔 고고학도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재현 혹은 복제는 흔히 이런 족속에는 무시 홀시를 부르기 마련이다.

 

복암리고분전시관


이곳 역시 나주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소위 고총 문화 중 그 총화라 할 복암리 3호분을 실물로 재현했다.

 

복암리고분전시관

 


재현이라 무시하지 말라.

백프로 완벽함을 구현하지 못했다고 탓하지도 말라.
있을 수도 없는 수치를 들어 그 가치를 폄훼하지는 말라.

 

복암리고분전시관



시간이 없어 일단 지금은 예서 중단하노라.
(2016. 6. 11)

 

***


This museum is a cultural facility to promote and promote the Naju Bokamrigo Tumuli. Please refer to the information provided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below for the Tombs at Bokam-ri, Naju. 

 

These tombs are the ancient tomb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Bogam-ri, Naju-si, Jeollanam-do.

 

A total of 32 different tombs had been excavated from one site (third tomb site) through this excavation from 1995 to 1997.

 

No other case similar to this one has been found.

 

The various forms of tombs could be seen from this site, such as jar coffin tomb, pit-style stone chamber tomb, stone-lined tomb, stone chamber tomb with tunnel entrances, and horizontal entrance stone chamber tomb.

 

Various finds including the golden bronze shoes, official caps, and swords with ring pommel indicate that these tombs belonged to people from the upper ruling class.

 

The dates when the tombs were built vary from the stone tomb built in the 4th century to the stone chamber tomb with tunnel entrances built between the late 6th century and the early 7th century.

 

As a result of the amalgamation between the indigenous people making jar coffin tombs around the Yeongsangang River and the people from the Baekje Dynasty building stone chamber tombs, various kinds of tombs had been built in this area.

 

Therefore, the ancient tombs in this area could serve as archaeological evidence that the Baekje Dynasty conquered the indigenous Mahan Dynasty.

 

Moreover, this area is a very important historic site providing crucial evidence for research on the ancient tombs and their historic changes.

 

In particular, the stone chamber tomb and jar coffin tomb present the standard for the research on the ancient burial custom and vestiges from the ancient tombs since they have been spared from any illegal excavation. 

 

 

是位于罗州伏岩里的三国时代的墓群,通过1995∼1997年的调查,发现了包括一座封土墓(三号坟)在内的32座各式墓葬。这一带在漫长岁月中陆续出现了各种墓葬形制与封土墓,这是荣山江流域的土著势力瓮棺墓系人们与百济势力石室墓系人们相互融合并将封土墓继续扩大的结果。古坟群是证明向这一带扩张的百济势力统治了当地马韩势力的决定性资料,为研究4∼7世纪墓群的性质与变迁过程提供了重要的资料。尤其是石室墓与瓮棺墓未被盗掘,是可以为埋葬方法及遗物研究提供标准的重要遗址。

 

羅州伏岩里にある三国時代の墓である。1995~97年までの調査を通じて、一つの封墳(3号墓)をはじめ、32基の様々な墓が発見された。長い歳月にわたる様々な様式の封墳が現われるのは、栄山江流域の土着勢力である甕棺墓系の人と、百済勢力である石室墳系の人が融合し、封墳を拡大し続けた結果である。つまり、この地域に進出した百済の勢力が土着勢力である馬韓勢力を支配したことについての決定的な資料で、4~7世紀の集団墓の性格と墓の変遷過程の研究に重大な資料を提供している。特に、石室墳と甕棺墓は盗掘されていなかったため、亡き骸を埋める方法及び遺物研究の基準が提示できる重要な遺跡になっている。

 

 

나주 복암리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들이다. 1995∼1997년까지의 조사를 통해 하나의 봉분(3호무덤)을 비롯하여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독무덤(옹관묘),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돌덧널무덤(석관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들로 다양하다. 출토 유물은 금동제신발, 관모, 고리자루큰칼(삼엽환두대도)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어 죽은 사람의 신분이 최고 지배층임을 보여준다. 4세기 돌무덤에서 6세기말∼7세기초의 굴식돌방무덤까지 볼 수 있다.

긴세월 동안 다양한 무덤양식을 한 봉분이 나타나는 것은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인 독무덤계 사람과 백제세력인 돌방무덤계 사람이 융합하면서 봉분을 계속 확대한 결과이다. 즉 이지역에 진출한 백제세력이 토착세력인 마한세력을 지배한 결정적 자료로서 4∼7세기 집단무덤 성격과 무덤변천과정 연구에 중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돌방무덤과 독무덤은 도굴이 되지 않아 시체를 묻는 방법 및 유물연구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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