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ngjusa Temple Site in Boryeong
It is the site of the Seongjusa Temple, which rested on the southern foot of Seongjusan Mountain.
The temple was newly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Beop in the age of Baekje and was called Ohapsa Temple at that time.
After Buddhist Monk Nanghye, one of the major monks who returned from China during the reign of King Munseong in Silla, extended the temple to enlarge it, however, it was named Seongjusa Temple.
Even though it is a temple that rests on the mountain area, it opted for the Garam type wherein the temple was placed on flat land, unlike other temples.
On this temple site are the site of Jungmun (main gate), a stone lamp, and a Five-story Stone Pagoda (Treasure No. 19) as well as Geumdang Hall from the south.
The East Three-story Stone Pagoda, Central Three-story Stone Pagoda (Treasure No. 20),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 (Treasure No. 47) are aligned side by side from east to west, with an auditorium at their rear side.
The Stele for Buddhist Monk Nanghye (National Treasure No. 8) whose epigraph was written by Choe Chi-won, one of the most famous scholars, is located north-west of the temple.
Many relics including base stones, heads of Buddha statue made by soil in the Unified Silla kingdom period, and tiles in the age of Baekje, Unified Silla, and Goryeo were excavated.
Seongjusa Temple was the best temple, with the epigraph of the Stele for Buddhist Monk Nanghye (National Treasure No. 8) the biggest piece of work with very high academic value.
是位于保宁圣住山南面山脚下的九山禅门之一圣住寺的遗址。挖掘调查结果发现了建筑物的础石、统一新罗时代的泥塑佛像头部、百济·统一新罗·高丽时代的瓦片等大量遗物。圣住寺是当时规模最大的寺院,崔致远题写的朗慧和尚白月普光塔碑是新罗石碑中的最大的作品,具有重要的学术价值。
保寧聖住寺址は保寧聖住山の南側の麓にある九山禅門の一つである聖住寺があった跡である。発掘調査の結果、建物の礎石、統一新羅時代の土で作った仏像の頭、百済・統一新羅・高麗時代の瓦などの多くの遺物が出土された。聖住寺は当代において最大の寺刹であり、崔致遠が書いた朗慧和尚白月葆光塔碑は新羅の石碑の中で最大の作品として非常に重要な学術的価値を持っている。
사적 제307호
보령 성주사지 (保寧 聖住寺址)
수량/면적 : 67,295㎡
지정(등록)일 : 1984. 08. 1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시대 : 신라 문성왕
소유자(소유단체)/관리자(관리단체) : 보령시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 했다.
산골에 자리잡은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 형식을 택한다.
절터에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중문 터, 석등, 오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 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선 동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이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한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 초석, 통일신라시대 흙으로 빚은 불상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 사찰 중 하나였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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