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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글씨로 만난 천하의 친일파 김대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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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우리는 황국신민이니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一、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그 유명한 <황국신민의 서사> 1조다.

1937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1874-1955)가 이른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들로 하여금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만들게 한 맹세문이다.

그런데 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만든 건 일본인이 아니었다.

당시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1888-1968?)이 초를 잡고, 사회교육과장 김대우(1900-1976)가 수정 완성한 뒤 총독에게 보고하고 배포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김대우'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대략 감이 잡힐 것이다.

과연 그는 일제 말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 전북도지사, 경북도지사까지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시곗바늘을 돌리면 그의 또 다른 행적이 엿보인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청년 김대우가 갓 스물이 되던 1919년 3월 6일, 경찰에 체포된다.

3.1운동 기획에 참여한 학생 비밀결사 지도부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검사와 만나서도 그는 설령 유죄판결을 받을지라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행위 자체는 정당하다고 설파했다.

이런 사람이 18년 뒤 <황국신민의 서사>를 완성할 사람이라고?

언뜻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정신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유치장에서 앞일을 걱정하며 불안에 떨던 그에게 평안도 강동 땅 천석꾼이던 아버지가 각계에 로비하여 구명운동을 펼친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 그는 진술을 바꿔버린다.

그리고 7월 열린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된다.

남들보다 좀 일찍 비겁해져 일제강점기 성공(?)한 지식인이자 고급 관료로 살았던 김대우.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공민권 3년 정지형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그 이후 행적은 좀 아리송한데, 6.25를 어찌어찌 버틴 모양으로 1960년 제5대 참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으나 낙선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6년 4월 22일 숨을 거둔다.

그가 일제 때 맡은 관직 중에 고적조사위원회 위원, 조선총독부박물관건설위원회 간사, 조선미술전람회심사위원회 간사 같은 게 있는 걸 보면 예술 쪽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서화에 능했다거나 하는 얘기도 딱히 듣지 못했는데, 우연히 그의 이름 글자 도장이 찍힌 대자 글씨 한 폭을 보았다.

기유년 곧 1969년에 고희(70세)라는 걸 보면 1900년생 '김대우'의 작품이 아무래도 맞지 싶다.

사진으로 본 그의 간찰 글씨와도 기울기나 획의 놀림이 비슷하다.

그의 글씨를 어떤 연구자는 '야호선'이라 비유했다.

불안정하고 제멋대로여서 기이하기만 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도 70세 노인 글씨치곤 진중하지 않고 어쩐지 가볍다.

능숙하게 행서를 써내려가긴 했지만 글자와 글자 사이 공간도 일정하지 않은 데다가 용두사미, 가면 갈수록 힘이 빠졌는지 크기가 줄어든다.

그걸 보완하려 했는지 끝획은 일부러 과장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아보인다(너무 혹평을 한 건가 싶어 좀 걱정스럽지만...).

글을 읽어보니 아무래도 김대우라는 사람이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송나라 소동파의 말이라는데...

도리가 심장과 간을 꿰뚫고
충의가 골수를 메꾸었다네

하여간, 1969년 신록이 한창인 봄날 김대우는 이런 휘호를 써서 기러기 홍자가 이름에 들어간 이에게 선물한다.

종이가 썩 고급은 아니어서, 그가 만년엔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가 싶기도 한데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마지막에 찍은 낙관도장 각만은 일품이다.

그가 잘 나가던 시절 성재 김태석(1874-1951)이나 위창 오세창(1864-1953) 같은 당대 일류급 전각가에게 받은 모양으로, 그의 호가 '수인'이란 사실을 이걸 보고 처음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상당하지 않나 한다.

혹시 김대우 이 사람이 왕양명(1472-1528)을 존경했던가?

(이 글을 쓰는 데 임경석 선생님의 《독립운동 열전 1》과 구본진 선생님의 《필적은 말한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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