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 깊숙한 곳, 림포포Limpopo 강과 루부부Luvuvhu 강이 흐르는 사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석조 유적 툴라멜라Thulamela 는 한때 강력했던 아프리카 왕국 흔적을 간직한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손꼽힌 툴라멜라는 그동안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곳이다.
금 유물, 인골 매장지, 수공예품 생산, 석조 건축물, 그리고 더 넓은 정치적 지형은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번성한 복잡한 아프리카 왕국 모습을 보여주지만, 수십 년 동안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들은 제대로 분석되지 않고 발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고고학 유적지 보존 및 관리(Conservation and Management of Archaeological Sites)에 발표된 이 연구는 툴라멜라를 낭만적인 잃어버린 도시가 아닌, 발견, 정치, 불완전한 연구, 그리고 오랜 침묵에 가린 그 역사를 왕실 및 경제 중심지로 재조명한다.

전략적 요충지 언덕 위의 석조 왕국
툴라멜라는 크루거 국립공원 최북단, 림포포 강과 루부부 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탁 트인 경관 속에 자리 잡는다.
이곳의 위치는 우연이 아니었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이 정착지는 내륙 지역과 아프리카 남동부 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교역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90년대 고고학 발굴 조사에 따르면, 이 성벽 유적은 약 9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했으며 건식 석조 벽, 주거 지역, 통로, 개방된 공간, 쓰레기 더미, 가축 우리, 곡물 저장고, 그리고 석조 거석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툴라멜라는 남부 아프리카 위대한 석조 성벽 중심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종종 마풍구브웨Mapungubwe 및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와 함께 거론된다.
하지만 저자들은 툴라멜라를 단순히 잘 알려진 유적 모델을 빌려 설명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랫동안 툴라멜라는 아프리카 수도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여겨졌지만, 툴라멜라 자체에서 발견된 증거는 내부 계층 구조, 민족 정체성, 정치 구조 등에 대한 강력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기에는 연구가 너무 미흡하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툴라멜라 주요 거주 시기는 마풍구브웨와 그레이트 짐바브웨 전성기 이후인 서기 1447년에서 1643년 사이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기적 배경은 툴라멜라가 철기 시대 후기 남부 아프리카에서 권력, 수공예 생산, 무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툴라멜라 역사를 바꾼 금
툴라멜라를 대중의 관심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금으로 만든 유물과 금 세공 흔적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인골과 함께 발견된 금 유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테이드 이후 과거를 재조명하던 시기에 툴라멜라를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업적을 상징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발견된 금 유물들은 단순한 호기심거리가 아니라, 철과 구리 유물, 방추spindle whorls, 구슬, 도자기, 동물 유해, 정교하게 제작된 물건 등 더 광범위한 유물 세계의 일부였다.
이러한 유물들은 숙련된 장인들이 거주하고, 풍부한 부를 누렸으며, 건축과 매장 풍습 모두에서 사회적 계층 구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착지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금 잔여물이 묻어 있는 도기 조각을 통해 금 세공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은 흔적 하나가 전체적인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툴라멜라는 단순히 금이 유통되거나 엘리트 계층이 착용했던 곳이 아니었다.
지역 공예 경제 일환으로 금을 가공하고, 모양을 만들고, 활용한 곳일 가능성도 있다.
금은 단순히 하나의 화려한 보물 이야기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금은 생산, 의례, 지위, 그리고 정치적 권위라는 더 광범위한 체계 일부다.
또한, 금이 인골과 함께 발견된 것은 툴라멜라에 누가 묻혔는지, 권력은 어떻게 과시되었는지, 그리고 부가 조상, 지도력, 그리고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움막 바닥 아래 묻힌 인골
1993년 복원 작업 중 시드니 밀러Sidney Miller와 그의 연구팀은 두 곳 움막터 바닥 아래에서 인골을 발견했다.
발굴된 유골은 연구 과정을 거친 후 지역 주민들과 협의해 다시 매장되었다.
이 두 유골은 종종 왕족의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하나는 남성,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 해석되었다.
이들은 족장, 왕, 왕비 또는 엘리트 가문과 연관지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러한 분류에 신중을 기한다.
연대 측정 결과, 남성과 여성 매장 시기가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왕과 왕비" 또는 고정된 왕실 구조와 같은 일반적인 가정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점이 유골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된다.
이 유골들은 툴라멜라 지역에 고위층 장례 풍습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더 탄탄한 발굴 기록, 완전한 연구 결과 발표, 그리고 새로운 연대 측정 작업 없이는 더 많은 것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한계도 드러낸다.
단순한 무역 그 이상: 공예, 권력, 그리고 일상생활의 중심지
툴라멜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내륙과 모잠비크 해안, 그리고 인도양 세계를 연결하는 장거리 교역망과 연결되었다.
유리구슬과 도자기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과 현지에서 가공된 재료들이 함께 발견된 것은 이 정착지가 더 광범위한 교역 체계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툴라멜라를 단순히 무역 중심지로만 보는 것은 더 큰 의미를 놓치는 일이다.
이 유적에서는 농업, 식량 저장, 공예품 생산, 금속 가공, 직물 관련 활동, 가정생활, 엘리트 공간, 매장 관습, 그리고 정치 조직에 대한 증거도 발견된다.
물레추Spindle whorls는 실이나 직물 생산을, 철제 화살촉과 금속 유물은 숙련된 기술을, 도자기와 동물 유해는 일상생활의 리듬을 보여준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구조는 계획적인 공간 활용, 이동, 권력, 그리고 통제된 출입을 암시한다.
툴라멜라는 단순한 무역로 거점 그 이상이었다.
툴라멜라는 사람들이 거주한 정착지이자 정치 중심지였으며, 수공예 중심지였고, 부와 정체성이 유물, 건물, 매장지를 통해 드러나는 곳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너무 성급하게 비교되는 왕국
툴라멜라는 돌담, 엘리트 거주 공간, 금, 언덕 위의 지형적 특징 때문에, 지도자들이 높은 곳이나 제한된 공간에 거주하고 다른 집단은 그 주변에 거주하는 계층화한 정착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소위 짐바브웨 패턴Zimbabwe Pattern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비교는 이해할 만하지만, 새로운 연구는 그러한 비교가 너무 성급하게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툴라멜라의 내부 조직에 대한 많은 주장은 다른 유적이나 후대 민족지학적 모델에서 도출된 가정에 의존한다.
울타리들은 족장 구역, 아내 거주지, 접견 구역 또는 공예 구역으로 명명되었지만, 이러한 해석 근거가 되는 증거는 다른 학자들이 검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세하게 발표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툴라멜라 유적 핵심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유적은 주요 왕국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하의 미개척 자료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롭게 발견된 유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부분에 관한 것이다.
1990년대 발굴 이후, 툴라멜라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은 상자에 담겨 프리토리아Pretoria 소재 디총 박물관Ditsong Museum에 보관되었다.
대규모 도자기 유물군, 물레추, 금속 유물, 구슬 등 여러 유물이 제대로 분석되지 않았다.
도면과 기록을 포함한 발굴 자료 상당 부분 또한 출판되지 않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스쿠쿠자 박물관Skukuza Museum에 전시된 금제 유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 유물들은 대중과 학계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공백이 툴라멜라의 명성을 형성했다.
툴라멜라는 언급될 만큼 유명해졌지만, 제대로 이해될 만큼 충분히 연구되지는 않았다.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은 발굴된 유물을 목록화하고, 비파괴 분석을 적용하고, 연대기를 재구성하고, 언덕 위 정착지를 주변 경관 속에 다시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살아있는 공동체와 얽힌 문화유산
툴라멜라 이야기는 크루거 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과 마쿨레케족Makuleke people 근현대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쿨레케족은 19세기와 20세기에 이 지역에 거주하다가 1969년 보호 정책이 확대되면서 강제로 이주당했다.
최소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은틀라베니Ntlaveni로 이주되었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토지 반환법[1994 Land Restitution Act] 제정 이후, 마쿨레케족은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토지는 반환된 후 국립공원에 임대되었다.
이러한 근현대사가 중요한 이유는 툴라멜라가 고립된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툴라멜라는 문화유산 분쟁, 강제 이주, 보호 정책, 그리고 공동체 기억이 얽힌 경관 속에 자리 잡는다.
저자들은 툴라멜라를 특정 현대 민족 집단에 지나치게 한정짓는 것을 피한다.
이 유적은 벤다Venda 족 유산과 연관되지만, 연구에서는 특정 현대 공동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지적한다.
벤다족, 총가Tsonga 족, 마쿨레케족 등 지역 주민들 목소리가 이 지역 유산의 중심을 이루지만, 고대 왕국 자체는 기존 명칭에 얽매이기보다는 신중한 고고학적 복원이 필요하다.

새로운 연구 방향
현재 연구팀은 성벽 유적을 넘어 더 넓은 지역을 조사할 계획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다.
이전 연구는 언덕 위 중심지에 집중되어 더 광범위한 정착지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연구진은 현재 기존 발굴 유물을 조사하고, 새로운 발굴을 계획하며, 더 넓은 지역을 조사한다.
툴라멜라 주변에서 이미 100곳이 넘는 고고학 유적이 확인되었다.
연구팀은 더 이상의 유적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LiDAR, 다중 스펙트럼 원격 탐사, 3D 문서화 기술을 활용해 지형을 지도화하고 기록할 계획이다.
이러한 포괄적인 접근 방식은 수십 년 동안 풀리지 않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툴라멜라는 언제 번성했을까? 그 권력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권력은 어떻게 조직되었을까? 왕궁 주변에는 누가 살았을까? 수공예품 생산, 농업, 무역, 그리고 정치적 통제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을까? 결국 이 정착지는 왜 쇠퇴했을까?

위기에 처한 취약한 왕국
툴라멜라는 연구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매우 취약하다.
홍수로 유적 일부가 손상되고 성벽이 무너졌다. 동물 활동, 도난, 불규칙적인 보존 작업, 그리고 자연적인 침식은 언덕과 아래 계곡에 있는 고고학적 흔적을 계속해서 위협한다.
위험은 직접적이다. 유적이 조속히 기록되고 연구되지 않으면 왕국 일부 구조를 복원하는 일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툴라멜라에서 재개된 발굴 작업은 단순히 새로운 학술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과 물질, 그리고 대중 관심에서 이미 잊힌 유적에서 증거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툴라멜라의 아프리카 역사 속 위치
툴라멜라에서 발견된 금, 매장지, 석벽, 공예품, 그리고 지형적 위치는 남부 아프리카 정치·경제사에 깊이 뿌리내린 왕국 모습을 보여준다.
툴라멜라는 역사 변두리에 있는 고립된 언덕 위 정착지가 아니었다.
숙련된 생산, 세습 권력, 지역 농업, 지역 권력, 그리고 장거리 교류가 활발했던 세계 일부였다.
잊힌 왕국 툴라멜라는 이제 새로운 질문의 중심에 서 있다.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사회가 복잡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가장 명확한 사례 중 하나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금은 처음으로 이 유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매장지는 이곳에 인간적인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미완성 기록 보관소는 이제 고고학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툴라멜라는 더 이상 단순히 잃어버리거나 잊힌 왕국이 아니다.
제대로 읽히기를 기다리는 미완의 역사다.
Forssman, T., van Heerden, J., Chewins, L., & Delius, P. (2026). Thulamela: Gold, Human Burials, and a Forgotten African Kingdom. Conservation and Management of Archaeological Sites, 1–18. https://doi.org/10.1080/13505033.2026.266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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