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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경주의 윤근일, 풍납토성의 윤근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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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땐 염색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검은색 머리칼이 나도 많은 때였다.


관련 기록을 들춰보니 2005년 6월 2일로 날짜가 찍혀 나온다. 당시 나는 경주에 출장 중이었다.

그날 밤 나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경주의 유명한 돼지껍데기 소줏집에서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와 동고동락한 분들과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자리는 사실 나로 인해 급작스레 마련됐다. 1973~1975년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 이후 지금도 발굴현장에서 활약하는 '반장'들의 증언을 듣고 싶다는 요청에 이 발굴단 멤버였던 윤근일 소장이 관련자들을 '집합'케 했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로 이 자리에는 윤 소장과 증언의 채록 대상으로 지금도 작업반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용만 반장' 김용만(金容滿) 선생과 '최 반장' 최태환(崔泰煥) 선생, 그리고 경주연구소 유홍식 선생과 이상구 선생이 자리를 함께했다.

그 옛날 각종 발굴에 얽힌 일화로는 그 이전에 윤 소장의 입을 통해 신물이 날 만큼 들었던 터였다. 그 래서 나름대로는 더 신선한 정보를 축적하고픈 마음에, 또 외람된 말이지만, 지금 아니면 평생을 발굴과 함께한 저들 '반장'들(이상 149쪽)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윤 소장을 통해 자리 주선을 부탁했던 것인데, 막상 소줏잔이 돌면서 쏟아져나오는 말들은 나로서는 망외의 소득이었다.

이 당시 우리 나이로 용만 반장은 75세, 최 반장은 64세, 그리고 윤 소장은 60세였다.

이야기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돌아 안압지로 이어졌고 황룡사지 발굴로 옮겨갔다. 이들 외에도 유·이 두 선생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일화들을 쏟아냈다.

이 자리에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윤 소장이다.

오랜 현장 동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킨 그에게서 쏟아진 고고학 현장들의 추억과 애환은 그간 단편적으로 그의 입을 통해 듣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역시 기억은 관련된 사람들의 기 억들이 합쳐져야 오류를 교정하고. 또 그 기억이 커버할 수 없(이상 150쪽)는 '묻힌 기억'들을 들춰내기 마련인가보다.

취기가 돌고, 나아가 돼지껍데기를 구워대는 열기와 연기에 모두가 얼굴에 땀을 흙칠 무렵 내가 마주친 윤 소장의 얼굴은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뭐랄까? 그 얼굴에는 한국 현대 고고학에 젊은 날을 고스란히 바친 무게 비슷함이 짙게 배어나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윤 소장을 안지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서 무수한 주름살을 보았다. 이젠 정말로 활갑을 맞은 '노인'이란 상념도 스쳐갔다.

아마 그 자신은 결코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20년, 아니 30년은 끄떡없을 것 이라 장담할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는 그만큼 변해 있었다. 이제 겨우 중년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나는 또 얼마나 변했을까?

얼마 전인 2006년 11월 21일,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그때의 사태'가 재연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이 조사를 맡은 옛 미래마을지구 발굴설명회가 개최된 이날, 인근 주민 수백 명이 현장에 몰려들면서 난동에 가까운 소란이 빛어졌다.

지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풍납토성 보존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선문대 이형구 교수를 성난 주민들이 에워싸고 협박하는 사태가 빚 어졌다.

사적 지정에 따른 사유재산권 침해와 그에 의한 부동산 가격 폭락 등에 분노한 주민들은 이 교수를 네 시간이나 조사단 사무실에 감금했다. 이 사나운 풍경을 계속 지켜보면서 나는 누(이상 151쪽)군가를 계속 떠올렸다.

이번보다 풍납토성 분위기가 더욱 험악하던 1997년 이래 2001년 무렵까지 저 성난 주민들과 거의 매일 마주했던 사람을 말이다.

그때 그는 이 풍납토성 현장에 자주 선글래스를 낀 모습으로 있었다. 그에게는 어쩌면 군인 같은 냄새가 났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때 떠올리는 면모겠지만, 덩치는 그리 크지 않으나 멀쩡한 '허우대'에 바리톤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로 절대 다수가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 차지하는 풍납토성 주민 시위대를 실로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젊을 땐 여자깨나 울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윤근일. 그에겐 분명 젊은 고고학도들이 죽었다 다시 깨어난다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어느 고고학 교본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평생을 함께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생활을 대과없이 마치고 새로운 삶의 개척에 나선 그에게서 붉게 타는 서산의 태양을 기 대해본다.

김태식(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

이상은 선생의 정년 퇴임을 기념한 회고록 《고고학의 늪에 빠져들다》(고래실, 2006. 12)에 부친 발문이다.

발문은 저 글과 더불어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병목 글까지 두 종이 수록됐다.

저런 퇴임 회고록 다른 발문으로는 신창수 선생 편이 있으니 이 역시 서재에서 원고를 찾으면 수록하려 한다.

저때 인연으로 두 반장은 모두 문화유산상인가? 국가훈장인가를 받게 된다.

나는 저 두 분을 한꺼번에 포상했으면 했지만, 연배 차이도 있고 해서 먼저 용만 반장 김용만 선생을 먼저 추천해서 그리 되었고, 최 반장 최태환 선생은 훗날 박윤정이 주도해서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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