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오두산성서 통일신라 때 축조된 내성벽 확인
노승혁 / 2022-05-04 10:36:44
(파주=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경기 파주시는 재단법인 가디언문화유산연구원과 오두산성에 대해 학술 발굴조사를 한 결과 내성벽(안쪽 성벽)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통일신라 시대 성벽이 처음 확인됐다고 4일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는 지난해 9월 문화재청의 발굴 허가를 받아 올해 4월까지 진행했다.
대상 지역은 오두산성 내성벽으로 추정되는 구간으로 특히 북동쪽 능선 구간을 집중 조사했다.
두물머리라고 하면 고유명사처럼 통용하지만 두물머리란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일반명사다. 영어로도 confluence라 하거니와, 이 역시 두 개 물줄기 흐름 플루언스 fluence가 con, come together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양주 혹은 양평 두물머리는 한강 두물머리라 해야 하며, 그것이 두물머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
한반도 두물머리 대명사는 그 규모로 보아 이곳을 따라갈 데가 없다.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그 지점이 단연 압권이라, 이 길목을 지켜야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내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수로를 장악한다. 이런 데는 반드시 톨게이트나 출입관리설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오두산전망대가 있는 오두산이라 바로 그런 곳이라, 이 오두산성 혹은 오두산전망대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은 내가 줄곧 설파하거니와 그 중대성은 아래 위성지도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 중요한 곳이며, 마침 이곳에는 그 지명을 따서 오두산성이라 이름하는 고대 산성이 있어 더욱 중대성이 증대하는 곳이기는 하나, 문제는 그 대부분이 강너머가 바로 북한이라 국방부에서 관리하는 땅이라는 특성으로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찔끔 발굴조사가 시행되기도 했으니 그 창건주 이재 선생이 육사 교수 출신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국방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방문화재연구원이라는 문화재전문조사기관에서 2005~6년 성벽 일부를 째고는 그 흔적을 확인했는가 하면, 그 이후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지표사인가도 벌인 적이 있지만, 조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더구나 그 중심 영역이라 할 성곽 내부 구역은 오두산전망대라는 거대한 함선이 깔고 앉은 형국이며, 철책선이 그 아래로 지나니 제대로 된 조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혹자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남정을 감행한 시절 백제와 사생결단식 쟁투를 벌인 관미성이라는 데가 바로 이 오두산성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거니와, 나 역시 그 지정학적 중대성에 견주어 그런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곳을 파주시가 (재)가디언문화연구원라는 데다가 의뢰해 문화재청 국고보조사업 형태로 이번에 발굴조사를 시행한 모양이라, 그 결과 공포되었으니, 아쉽게도 기대한 그런 완연한 삼국시대 성벽은 보이지는 않고 다만 성벽 기초부 흔적만 드러났으니, 저에 의하면 내성벽으로 추정되는 구간에서 통일신라시대 성벽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이번 조사는 2021년 9월 문화재청 발굴허가를 득하고는 조사에 착수해 2022년 4월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조사 대상지는 오두산성 내성벽으로 추정되는 구간이며 그중에서도 북동쪽 능선 구간이 중심이라고 한다.
그 결과 드러난 통일신라시대 성벽은 석축기단 안에다가 2m~3.5m인 간격으로 영정주永定柱라 해서 나무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이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영정주 얘기 나온 김에 그냥 나무기둥이라 하면 되지 왜 이런 씨잘데기 없는 말을 만들어 그것이 마치 전문용어나 되는양 잘난 체 하는지 모르겠다.
암튼 조사단에 의하면 중부지방에서 이런 성곽으로 강화 중성과 청주 우암산성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며, 통일신라시대 성벽으로는 오두산성이 첫 확인 사례라 한다.
부디 이런 일들을 시발로 오두산성 일대가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졌으면 싶다.
오두산성에 증언은 고려~조선시대 지리서에 위치와 규모에 관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지도에 표기된 오두산성에 대한 명칭도 烏島山(오도산)→烏頭(豆)山(오두산)→鰲頭山(오두산) 순으로 명칭이 변화한다.
오두산의 명칭 변화로 파주 오두산성의 명칭도 오도성(烏島城),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 오도산성(烏島山城), 오두산성(鰲頭山城) 등의 순서로 함께 변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까마귀 형상을 띈 섬 형태의 산이란 의미를 지니다가 점차 까마귀 혹은 비둘기 등 새 머리 모양을 가진 산으로 바뀌었다. 조선후기에는 자라 머리의 모습을 닮은 산으로 불려 현재까지도 불리고 있다.
이러한 지명은 오두산이 지형적으로 삼면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고 강안(江岸)에서 돌출되어 나온 지세를 빗대어서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파주 오두산성을 백제 관미성으로 처음 비정하여 기록된 사료는 대동지지(大東地志, 1864년)다. 관미성(關彌城)이란 명칭은 삼국사기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특히 4세기 후반 대에 집중되어 나타나며, 백제와 고구려의 격전지로 묘사되어 있다.
관미성 기록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 3, 진사왕 8년(392년)
秋七月, 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7월에 高句麗王(고구려왕) 談德[담덕:廣開土王(광개토왕)]이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北邊(북변)을 쳐 石峴[석현:지금의 開豐郡(개풍군) 靑石洞(청석동)]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談德(담덕)이 用兵(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漢水(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이 많이 함락되었다.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대왕 원년(392년)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
10월에 (왕이)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城(성)은 사면으로 峭絶(초절)하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 3, 아신왕 2년(393년)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8월에 (아신)왕이 武(무)에게 이르기를, "關彌城(관미성)은 우리 北邊(북변)의 要害地(요해지)인데 지금은 高句麗(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寡人(과인)의 痛惜(통석)하는 바다. 卿(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雪辱(설욕)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병사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南境(남경)을 칠 것을 계획하고, 武(무)가 몸소 士卒(사졸)에 앞장서서 矢石(시석)을 무릅쓰고, 石峴(석현) 등 다섯 城(성)을 회복하려 하여, 먼저 關彌城(관미성)을 둘러쌌으나 고구려 사람이 성을 굳게 지켰다. 武(무)는 糧道(양도)가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 기사
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模盧城幹弖利□□□城關彌城牟盧□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彌城奧利城勾牟城古須能羅城頁□□□□城分而能羅□城□□城□□□豆奴城沸□□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께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대군이 백제의 국경 이남에 도착하여 寧人城…각미성(閣彌城10))(지명생략)…등을 공취하여 백제의 국도를 핍박하였다.
오두산성 조사내력을 정리한다.
오두산성Ⅰ 발굴조사 보고서
- 1991. 7. 13 ~ 1992. 10. 12.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에서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성벽과 성벽의 흔적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A지구에서 L지구까지 12개 지구로 나누어 장방형 긴 피트를 시굴하는 방법으로 잔존 성벽 유무를 확인하는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유물은 다수 와편과 토기편, 철촉, 꺽쇠, 철못 등이 확인되었다. 와편은 고려시대, 조선시대 와편이 상당수가 출토되었고 연질 격자문 적갈색 와편이 상당수 출토되어 삼국시대 성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 내부조사에서 상초, 하초 등의 글자가 찍힌 와편이 상당수 수습되었다.
오두산성 동벽 유구조사
- 2005. 12. 29 ~ 2007. 3. 29.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에서는 붕괴된 성벽 일부를 보수⋅정비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동벽의 잔존 유구를 조사하였다. 면석은 기반암 위에 장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가로쌓기 형식으로 1~2㎝ 되물림으로 쌓았고 잔여 단층은 3~11층으로 높이는 80~180㎝ 정도이다. 뒷채움석은 암반과 연하여 다양한 작은 타원형의 석재들을 조합하여 쌓았고 점토층 판축은 확인되지 않았다.
3) 파주 오두산성 정밀지표조사
- 2006. 12. 29 ~ 2006. 5. 15
(재)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는 오두산성에 대한 전체 현황을 파악하고 잔존유구의 상태를 살피며 성벽 조사를 통하여 평면 형태와 구조를 파악하였다. 하지만 통일전망대와 군부대 시설물로 인해 산성의 파괴가 심각하여 지표조사와 현황측량으로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기존에 알려진 내성의 남쪽 계곡부를 감싸고 외성이 축조된 복곽성의 형태로, 내성의 규모는 동서 320m, 남북 280m이며 둘레는 1,240m 정도이고, 외성은 규모는 동서 320m, 남북 380m이며 둘레 길이는 1,228m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내부시설로는 추정 수구지 2개소, 건물지 7개소, 우물지 1개소, 산성 밖 유물 산포지 1개소 등 오두산성의 구체적인 현황이 확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두산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권56 지리지 교하군
交河郡 有烏島城[漢江臨津下流會于此]
교하군(交河郡) 오도성(烏島城)이 있다[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이곳에서 합류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교하현
烏島城 [在縣西, 漢江臨津下流會于此]
오도성(烏島城)[현 서쪽에 있다.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의 하류(下流)가 이곳에서 합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 교하현 산천조 고적
(山川)烏島城山[在縣西七里]
오도성산(烏島城山)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古跡)烏島城山城[石築周二千七十\一尺 漢江臨津下流會于此]
오도성 산성(烏島城山城) 석축이고 둘레는 2,071척(약 635m, 영조척 1尺=약30.65㎝)이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여기에서 합류된다.
동국여지지 2 경기도 교하 고적
烏島城山城 石築二千七十\一尺 相傳三國時所築 漢江臨津會于其下
오도성 산성 석축이고 2,071척이다. 삼국시대때 쌓았고 한강과 임진강이 여기에서 합류
된다.
여지도서 경기도 교하 산천 고적
(山川) 鰲頭山一名鳩鳥山 臨津漢水之流來會于山前
오도산(鰲頭山)은 일명 구조산(鳩鳥山)이라고도 한다. 임진과 한강의 물이 흘러서 산 앞에
서 만난다. (古跡) 鰲頭山城 在鰲頭山上 石築 周回千餘步
오두산성(鰲頭山城)은 오두산 위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천여보이다.
증보문헌비고 제21권 여지고 산천 경기 교하
交河 烏頭山[一名鳩鳥 輿地勝覽作烏島城 邑誌作鰲頭 在西七里]
교하(交河) 오두산(烏頭山) [일명 구조산(鳩鳥山)이라 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오도성(烏島城)이라 하였고, 읍지(邑誌)에는 오두산(鰲頭山)이라 하였다. 서쪽 7리에 있다]
증보문헌비고 제26권 여지고 관방 성곽 경기 교하조
交河鰲頭山城[輿鑒作烏島城山城] 三國時所設石築[周千餘步今廢]
교하(交河) 오두산성(鰲頭山城) [《여지승람(輿地勝鑒)에는 오도성산성(鳥
道城山城)이라 하였다] 삼국시대 때 설치한 것으로서 돌로 쌓았다.[둘레가 1천여보인데, 지금은 폐성이다]
대동지지 경기 교하
烏頭城 臨津漢水會合處
本{百濟關彌\城周二千七十\二尺四面峭絶唯東連山麓三面環
以海水距郡西北十\四里長命山古壘有遺址
오두성(烏頭城) 임진강과 한강이 합하여 모이는 곳으로 본래 백제 관미성으로 둘레가 2,072척이다. 4면이 절벽이고 삼면이 바닷물로써 둘러싸여 있다. 군에서 서북쪽으로 14리 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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