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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70

한달간 병석에 누웠다가 간 “중흥의 군주” 고려 현종 전통시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군주의 죽음을 기록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보통 왕이 언제 불예不豫하다 하고는 보통은 그 이튿날 아니면 사흘째에 붕崩 혹은 훙薨이라 뜬다. 군주한테 쓰는 불예不豫를 보통 몸이 편치 않다는 정도로 옮기지만, 그 자체 중병에 대한 완곡어법이기는 하지만, 실상 이 말이 쓰이는 맥락을 보면 회복 불능한 중태라는 뜻이다. 고려 제8대 임금 왕순王詢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 중태에 빠진지 한달만에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뇌출혈이나 뇌일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고려사와 절요에 의하면 재위 22년째인 1031년 4월 28일 을사에 병져 누운 그는 대략 한 달 뒤인 다음달 5월 25일 신미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서한다. 왕이 병이 위독해지자 태자 왕흠王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는.. 2024. 2. 19.
[귀주대첩] (2) 거란 버리고 宋에 접근했다 쌩까인 고려 그나마 전쟁 속에서도 이어지던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린 고려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宋과 붙어야 했다. 하지만 宋도 문제였다. 거란 대신 파트너로 선택하려 했고, 실제 993년 제1차 고려거란전쟁 직전까지는 고려의 종주국이었지만,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무엇보다 송 역시 거란에 대항할 힘을 상실하고 만신창이 난 상태였던 까닭이다. 거란의 사신 입국과 고려에 의한 송으로의 외교 사절 파견은 동시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런 양태가 훗날 동파 소식한테서 고려는 쥐새끼 같은 놈들이며 믿을 수 없다는 사자후를 토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하는 고려가 송으로서는 얼마나 얄밉겠는가? 하지만 송 또한 고민이 적지 않았으니, 그렇게 필요하다고 찾아온 고려를 내칠 수.. 2024. 2. 19.
[귀주대첩] (1) 파탄난 고려-거란 외교 고려와 거란 두 왕조가 직접 대규모로 충돌한 이 전쟁을 흔히 3차라 해서 세 시기로 분기하지만, 이는 근현대 사가들이 규정한 것일뿐 그 사이에 직접 군사충돌만 해도 무수했으니, 특히 그 충돌은 이른바 제2차와 제3차 전쟁 사이에 빈발했다. 이들 전쟁을 개괄하면 서기 993년, 성종 재위 12년 이른바 1차 전쟁이 물경 80만(물론 개뻥이다. 수십 만에 지나지 않았다)을 주장한 그 군사력 동원 규모를 볼 때 비교적 순조롭게 끝난 까닭은 양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외교협상이 빛을 발한 까닭이다. 당시 거란이 원한 것은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 패권국가 공인이었고 그 완결은 고려의 신속臣屬이었다. 당시 고려는 여전히 宋과 내왕하며, 송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그쪽에서 책봉을 받아오고 조공했으며, 연호 또한 송나라 .. 2024. 2. 19.
거란, 깔아준 멍석 일전에 글쓰기 역시 시류에 편승해야 한다 역설하며 거란과 고려를 소재로 떠들어대는 나를 변명했지만 혹자는 지가 고려 거란에 대해 뭘 알아 저리 나대는가 하겠지만 불알 두 쪽으로만 떠들겠는가? 고려는 틈나는대로 닥치는대로 읽었으니 생각보단 이쪽은 아주 오랜 기간 나로서는 나름 절차탁마했다. 문제는 거란. 이 거란은 대략 25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그 무렵 산서성을 혹닉하던 때라 그때부터 관심이 일었고 이후 그곳을 몇 차례 더 다녀오고 또 언제인가는 요서지방 일대를 답사하며 그 갈증에 닥치는대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거란을 내가 써먹을 일이 마뜩히 없었다. 그냥 썩혔고 그러다 다른 데 관심이 일면서 이내 뒤켠으로 물렸다. 그러다 단국대 쪽에서 요사 금사를 완역해 내자 다시 그쪽에 붙.. 2024. 2. 18.
한국이 소비하는 거란, 언제나 곁다리 이 주체를 이른바 직업적 학문종사자로 국한한다면, 이 분야를 개척한 주인공은 동빈 김상기다. 1세대 역사학도가 거개 그렇듯이 동빈 역시 잡탕이었다. 동빈이 지닌 가장 큰 무기는 한학漢學이었다. 그는 한문이 동시대 어떤 연구자보다 탁월했다. 서울대에 교편을 잡으면서 동양사라 특징지을 만한 일군의 학도를 길러냈고, 지금 한국에서 동양사라 하면 거개 동빈을 남상으로 삼는다. 이 동양사는 지금은 합쳐진 듯한데, 서울대에 동양사학과가 별도로 독립하고, 고려대 역시 그러했다고 기억하거니와, 아무튼 이 두 학교를 발판으로 동양사는 나름 독자성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쓰는데, 이 동양사가 탑재한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 서양사랑 따로 노는 문제였다. 이를 역사 영역 전반, 특히 한국사를 기준으로 한국사 영역으로 급격히 포섭.. 2024. 2. 18.
[거란의 치맛바람] (13) 남편은 도륙되어도 공주는 살아남는다 이 경우는 사실 치맛바람이라기보다는 황제 혹은 황후의 권위라 봐야 한다. 부마도위에 책봉된 황제의 사위가 반란과 같은 불미한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해도 공주가 그에 직접 관련되지 않고서는 같이 처벌받는 일은 없었다. 거란 6대 황제 성종聖宗은 처첩한테서 14명에 달하는 딸을 둘었으니, 후궁 중 한 명이 대씨大氏가 있다. 보나마나 대조영한테로 거슬러 올라가는 발해 계통이라, 그는 딸 하나를 두는데, 이름이 장수長壽다. 당시 이름을 보면 불교에서 비롯한 전통과 더불어 장수를 기원하는 뜻 글자가 많은데 장수와 더불어 연수延壽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 공주는 엄마 격이 좀 떨어져서 처음에는 공주로 책봉되지는 못하고 그 아랫등급인 군주郡州가 되는데, 조선시대로 보면 옹주 정도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임해군주臨海郡..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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