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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23

고려 이전 태실은 왜 개무시되었는가? 첫째 사례 빈곤이라 신라 이전 태실은 오직 김유신 사례 하나만 보고됐을 뿐이니 이 김유신 태실만 해도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 저록되기는 했지만 워낙 평지돌출인 까닭에 그 존재 자체 실존 자체까지 내심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기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서 이것이 태실이라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태실은 더욱더 그 중대성에 견주어 그런 실물자료가 많이 남은 조선시대 위주로 논의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마왕퇴 백서에 대한 개무시도 저와 같은 경향에 기름을 부었으니 나는 이 태실 전통이 중국대륙 남쪽 장강 문화권에서 비롯하고 그것을 중심 혹은 일부 지역으로 포함하는 기원전후 무렵 동아시아 문화권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함을 틈나는대로 역설하거니와 이 문화권은 중국 남부와 한반도 남부 그리고 일본열도 중남부를 .. 2024. 4. 1.
마왕퇴의 귀부인 책 소개 <발굴기로 만난 중국 마왕퇴 유적>(2001) 2001.03.15 16:07:18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여름 백제의 고도 충남 공주에서 실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으로 한국 사회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7일 양쯔강 남쪽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라는 곳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발굴이 테이프를 끊고 있었다. 당시 중국 사회는 문화대혁명과 소련과의 극한 대립이라는 두 가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소련과는 전쟁까지 벌일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군(軍)에는 소련의 원자탄 공격에 대비해 참호를 파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에 따라 해방군 366병원은 일단 유사시를 대비해 마왕퇴(馬王堆)라 일컫는 잡초 무성한 언덕에 방공호를 파내려 가기 시작했다. 10m가량 굴을 파고 내려가.. 2023. 10. 24.
마왕퇴 (2): 마왕퇴 발굴을 보는 시각 웨난岳南 책은 대중서이지만 마왕퇴 개설서 삼아 읽기도 좋다. 마왕퇴 고분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박물관에 전시될 때까지 전 과정을 가감없이 시간순으로 적어놨기 때문이다. 岳南은 인민해방군 출신 경력이 그의 글에 독특한 시각을 부여했다고 보는데 비교적 개혁개방이후 중국 정부 시각을 고고학 발굴에 충실히 투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왕퇴 무덤의 경우 발견 당시부터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과정을 岳南은 일관되게 사인방으로 대표되는 문화혁명 도당 일파와 이에 맞서는 합리적 간부들의 싸움으로 묘사하는데 후자는 발굴 현장에서 땅을 파고 있는 고고학자들과 위로는 주은래, 곽말약이 속하는데 이들은 마왕퇴 발굴과 조사를 부단히 훼손하려는 사인방의 획책에 묘안을 짜내어 필사적으로 막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마왕퇴 발굴과 조사가.. 2023. 10. 24.
《내가 보는 위만조선과 낙랑》(4) 마왕퇴에서 생각한 위만의 무덤 2006년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봉직하던 최몽룡에게는 회갑인 해였다. 그는 본교 제자도 많았지만, 고고학 전담 교수가 없는 다른 대학에서도 지도한 외곽 제자도 만만치 않았으니, 백제를 필두로 하는 역사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 주류성 사장 최병식도 그런 사람에 해당한다. 백제에 미쳐, 특히나 그 마지막 왕 의자의 신이 강림했다고 믿는 최병식은 형제들이 모두 박사학위가 있는데 장남인 자신만은 없다는 점을 못내 한스러워해 50대 늦깎기로 두 대학에 석박사로 등록해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이 과정에서 불과 5살 정도 많을 뿐인 최몽룡의 제자 그룹에 들어간다. 최몽룡이 환갑을 맞은 그해 9월, 최병식은 선생의 환갑 선물로 중국 여행을 준비한다. 기간은 대략 4박5일 정도 되었다고 기억하.. 2023. 6. 15.
마왕퇴馬王堆 태산서胎產書 충북 진천엔 김유신 태실이 있다. 그는 진천 태생이고 더구나 삼국사기에 그의 태실이라 했으므로 이곳이 진짜 그의 태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데 관건은 이를 제외한 태실 조성 관련 기록이 조선시대 이전엔 전연 안보인다는 사실이다. 중국 기록을 봐도 당대 이전 문헌에서 태실 관련 기록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김유신 태실은 평지돌출이다. 한데 내가 십수년전에 검토한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塞 출토 백서錦書 중 태산서胎產書를 보니, 그에 태를 안치하는 방법을 기록한 대목이 있고, 더구나 그 대목에 붉은 펜으로 내가 차기劄記하기를, '김유신 태실'이라 한 메모가 있는 옛날 책을 발견했다. 이런 등신 멍충이 바까야로 (2017. 4. 21) *** 마왕퇴 백서白書 중 하나로 본래 이런 이름이 아니라, 나중에 이를.. 2021. 4. 21.
도서목록집이 그 시대 도서문화의 총화는 아니다 한때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이니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같은 도서목록집(이들은 모두 남송시대 유산이다)이 그 시대 출판 문화의 총화라는 인식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통용한 모든 책을 저들 목록집이 커버한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특히 시대를 거슬러 저들의 남상인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가 누린 위상은 가히 절대였다. 이 《예문지》는 전한前漢 말 유향劉向이 정리한 당시 도서목록 해제집을 그대로 축약한 것이니, 그에서 보이는 도서들은 적어도 전한시대 말기에 통용한 모든 도서를 커버한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예문지》 신화는 여지없이 깨졌다. 지하에서 무수한 간독簡牘과 백서帛書가 출현하면서 여지없이 그 신화가 무너졌다. 나름 빠짐없이 정리했다고 생각한 저들 목록집에도 구멍이 너무나 많아 누.. 202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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