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사례 빈곤이라 신라 이전 태실은 오직 김유신 사례 하나만 보고됐을 뿐이니
이 김유신 태실만 해도 삼국사기 그의 열전에 저록되기는 했지만 워낙 평지돌출인 까닭에 그 존재 자체 실존 자체까지 내심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기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서 이것이 태실이라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태실은 더욱더 그 중대성에 견주어 그런 실물자료가 많이 남은 조선시대 위주로 논의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마왕퇴 백서에 대한 개무시도 저와 같은 경향에 기름을 부었으니
나는 이 태실 전통이 중국대륙 남쪽 장강 문화권에서 비롯하고 그것을 중심 혹은 일부 지역으로 포함하는 기원전후 무렵 동아시아 문화권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함을 틈나는대로 역설하거니와
이 문화권은 중국 남부와 한반도 남부 그리고 일본열도 중남부를 포괄한다.
이들 지역은 내 추정에 의하면 중국 기준 전국시대 중말기에는 확실히 하나의 문화권역을 그리며 그것이 극성한 시대는 기원전후 무렵 서기 5세기 무렵까지로 본다.
이는 소위 낙랑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낙랑을 중심으로 동북아사를 전개하는 작태를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낙랑은 과대포장됐다.
각설하고 저 태실전통이 중국에서는 이상하게 장강문화권에만 남아 성행했으니 그것을 우뚝히 증언하는 존재가 마왕퇴 한묘 백서 태산서胎産書다.
이를 보면 기원전 2세기에 저짝 장강에선 명백히 안태安胎문화가 있었다.
나는 이 태산서를 주목해야 한다고 틈날 때마다 외쳤거니와 그것이 웅변하는 안태 장태藏胎가 한반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안태 장태는 한반도 돌출이 아니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 한 패턴인 것이다.
이 마왕퇴를 시발 혹은 중심에 놓음으로써 한반도 태실문화는 고립성을 비로소 탈피한다.
한데 이 마왕퇴가 태실문화 전개에서 지닌 저 우뚝한 중요성이 너무 쉽사리 간과되고 말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저런 전통과 그것을 웅변하는 문헌이 있는 줄도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마왕퇴가 출현함으로 김유신 태실은 비로소 동아시아 문화 맥락에서 접근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그 전통이 한반도에서는 늦어도 삼국시대엔 있었고 그것이 줄기차게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에 만개하고 지금은 태반 보관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제 다음으로 고려시대 장태문화를 엿보고자 한다.
이 고려시대 안태 양태야말로 김유신과 이성계의 태실을 잇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심대한 고리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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