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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이완용9

[서예가 이완용] (11) 윤치호와 이완용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이완용의 글씨를 보고 그 소감과 비평을 한다는 것이, 어느새 근대 한국 서예사 이야기로까지 넘어갔다. 일단은 여기서 그치려고 한다.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점은 이야기하련다. 이완용이 매국賣國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한국 근대미술사의 등장인물로는 여겨야 그 안의 많은 의문점이 해결되고 또 풍성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의 일기에 나오는 서화미술원 언급만으로도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약간 다른 걸 논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그런 작업을 이완용이 죽일 놈(이미 죽었지만)이라고 해서 미뤄두어야 할까.역시나 친일파였던 윤치호(1865~1945)가 남긴 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필수 텍스트 중 하나로.. 2024. 8. 8.
[서예가 이완용] (10) 서화전 보러 간 일당一堂 우연히도, 이완용의 일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서비스 제공을 해주고 있는데, 1911년 일기만 남아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잠깐 훑어보다가 재미있는 기사 한 토막을 건졌다. 1911년 3월 2일 목요일(음력 2월 22일), 음산한 날이었다.  성내 서화가 제인諸人이 서화미술원을 만들고 서화를 진열하여 공람供覽케 하고 겸하여 내게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오후 2시에 원院에 갔는데, 여러 화사畵師와 필객筆客 모두 당세의 이름있는 사람들이었다.이때에 가서 본 사람들은 평재 박제순(1858-1916), 우정 고영희(1849-1916), 낭전 조중응(1860-1919), 박기양(1856-1932) 대감, 김종한(1844-1932) 대감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 2024. 8. 6.
[서예가 이완용] (9) 변화하는 법첩法帖 흐름을 잘타서 성공한 김규진 그런 시대 흐름[사진이 법첩을 대체하는 시대 변화]을 잘 타고 성공한 서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해강 김규진이다. 차별받던 평안남도 출신이었음에도 고종과 엄귀비 신임을 받아 영친왕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한 해강은, 법첩을 근거로 하는 걸 넘어 그 스스로 법첩을 만들어냈다. 그는 , 같이 난초 치는 법, 대나무 치는 법을 직접 그리고 목판 또는 석판으로 인쇄해 책으로 엮어 팔았다. 당시로서는 그 인기가 대단한 것이어서, 1916년 초판이 나온 뒤 1918년 새롭게 꾸민 재판이 발간될 정도였다. '근대 서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김규진, 그도 이완용과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다.앞서 이완용이 을 썼다는 얘기를 잠깐 했다. 1922년 9월 그의 이 석판으로 인쇄 발간되는 바, 그 제첨題簽을 김규진이 썼다. .. 2024. 8. 6.
[서예가 이완용] (8) 사진이 부른 법첩의 혁명 이번에 쓰는 글은, 이완용뿐만이 아니라 근대에 글씨 좀 썼다 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될 지점을 건드려보고자 한다. 이른바 '근대'의 역설이랄까. '근대'란 '전근대'를 마냥 부정하며 일어섰으며,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더 그랬다고 볼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일본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든지, 중국 민국시대 잡지가 주도한 신문화운동이라든지 보면 그런 면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통 예술이나 사상, 문화가 '서양 기술의 등에 업혀서' 더 빠르게 사회 저변에 보급되고 파고들 수 있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근대가 전근대를 부정했다고만 볼 수 있을까? 외려 근대가 전통을 더 조장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법첩法帖이다. 역대 .. 2024. 8. 4.
[서예가 이완용] (7) 신문 신년 휘호 지금이야 윤전기에서 갓 나와 따끈따끈한 신문지 뭉치를 포장용으로 수출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 땅에서 신문이란 참 대단하고 권위가 있는 매체였다. 그때 그 시절 신문사에서는 새해나 기념할 만한 날에 명사의 붓글씨나 그림을 받아 신문지상에 싣곤 하였는데, 이완용의 글씨도 제법 보인다. 첨부 사진들에 신문에 실린 이완용 '휘호'가 보인다.당연하게도(?) 이완용의 글씨는 총독부 기관지 나 일본어 신문 같은 데만 실렸고, 나 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차례대로 1916년 10월 3일자 , 1926년 1월 1일자(왼쪽 아래. 가운데 턱 하니 실린 것은 총독 사이토 마코토(1858~1936)의 휘호) ,   1918년 9월 30일자에 실린 이완용 글씨다. 완完의 마지막 획과 용用의 .. 2024. 8. 3.
[서예가 이완용] (5) 안진경을 흠모했지만... 그 주인 행적은 일단 젖혀두자. 철저하게 글씨만 놓고 보더라도 이완용 글씨가 ‘좋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약간 갸웃거려진다. 앞서 이완용이 ‘평상심시도’를 즐겨 썼다고 했는데, 남아있는 (사진 1)를 보면 바탕이 크건 작건, 글자 배치나 획 움직임이 거의 같다. 독창성이 별로 없는 셈이다. 또 백은의 글씨와는 달리 글자가 너무 매끄러워 보인다. 비백이 있음에도 거칠다기보다는 부드럽게 흘러가버린다고 해야 할까. 선승의 글씨를 흉내내긴 하였으나 그 내용이나 글씨체 의도에 제대로 맞게 쓴 것 같지는 않다. 는 상대적으로 좀 덜하지만, 이완용의 다른 글씨(사진 2)를 보면 획의 과장이 때로 심하게 느껴진다. 술을 좀 과하게 했던지, 아니면 자기 자랑하는 맛에 글씨를 썼기에 나타나는 현상일까. 애초에 기교가 승..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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