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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12

[1차 고려거란전쟁] (2) 거란의 요구를 파악한 서희 뒤늦은 대처에 급조한 군사로 거란을 방어하고자 한 고려 조정이 얼마나 허둥지둥댔을지는 안봐도 비디오라, 그래도 일단 한 번 막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겠고 해서 고려는 역시나 문관 중심 사령부를 구성하니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가 총사령관인 상군사上軍使가 되고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煕는 넘버투인 중군사中軍使,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은 하군사下軍使가 되어 북계北界에 진을 치고서는 거란을 방어하는 시늉을 한다. 이때 고려 성종은 서경西京에 행차 중이었으니, 전방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연례 행사라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왕 나간 김에 안북부安北府까지 가서 전방을 시찰하려 한다. 이 무렵 소손녕蕭遜寧은 이미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顏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에 이.. 2024. 3. 1.
[1차 고려거란전쟁] (1) 뻘짓한 고려 편의상 고려거란전쟁을 세 차례 있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그것 말고도 두 왕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끝임없이 벌어졌다. 치열한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 서막을 연 것이 널리 알려졌듯이 993년, 고려 성종 12년, 요遼 통화統和 11년에 펼쳐진 제1차 전쟁이라 이 전쟁이 실은 두 왕조에 모두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거란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자칭 80만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했지만 이는 개뻥이며, 실제 동원한 군사는 절반도 안 된다. 쪽수가 많다 해서 겁박했을 뿐이다. 다행해 이 전쟁이 이렇다 할 충돌없이 외교협상으로 끝나서 그렇지망정이지 하마터면 고려 국토가 초토화할 뻔 했다. 우리는 이 조우에서 세 치 혀 서희에 의한 이른바 강동육주 획득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외교협.. 2024. 3. 1.
서희, 여든 할아버지가 으랏차차 해서 얻은 아들의 아들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에 태어나 1973년 4월 8일에 죽었다. 백수가 흔치 않게 된 요즘이야 대수롭지 않겠지만 당시 의료 사정을 고려할 때 92년 성상이라는 기록적인 장수를 누렸다. 더 큰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정력이 더욱 용솟음쳤다는 사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제낀 그의 마지막 자식은 팔로마 피카소로 알고 있는데 1949년생이라, 68세에 낳은 딸이다. 피카소보다 대략 천살 많은 서신일徐神逸이라는 사람은 피카소를 무색케 한다. 친구들은 다 송장이 된 여든살에 으랏차차 해서 아들을 낳았고, 더구나 그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과 다시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모조리 재상을 지냈으니 이렇게 후손 복이 많은 사람 있을까 싶다. 그의 아들이 내의령內議令까지 지낸 서필徐弼이요, 서필의 아들이 이.. 2024. 2. 7.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저 강동육주江東六州라는 말은 전통시대 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못내 옛날부터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대로 저 시대 역사를 설명할 때는 편리한 점이 많아 그대로 따르기는 했지마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우리한테 각인한 이미지는 서희라는 세 치 혀로 무장한 뛰어난 고려시대 외교관이 80만 대군이라 설레발 친 거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지어 그 자리서 저 땅을 받았다고 하지만 천만에. 당시 양쪽 조정을 대표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밀실 야합이 있었는지는 고려사(절요 포함)와 요사 모두 침묵하지만, 이후 전재된 양상으로 보건대 명확해서, 또 많은 이 시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고려는 송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끊고 이제부터는 거란을 종주국으로 섬겨 요나라에서 조공 책봉을 받겠다. .. 2024. 1. 30.
왕의 부인임에도 능陵에 묻히지 못하다 의 축, 임금 현종顯宗(992~1031)에게는 13명의 왕후와 후궁이 있었다. 그중 원목왕후元穆王后 서씨徐氏(?~1057)라는 이가 있다. 이천 서씨로 내사령內史令 서눌徐訥(?~1042)의 딸이고, 세 치 혓바닥으로 거란 군사를 되돌린 서희徐熙(942~998)의 손녀다. 현종과 1022년(현종 13) 혼인하였으니 아마 1000년~1005년 어간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종보다는 26년을 더 살았다. 그가 죽자 문종은 이런 명을 내린다. 후비 열전을 보면..... 문종文宗 11년(1057) 5월에 죽자 ... 또 제制를 내려 명하기를, “흥성궁주興盛宮主의 화장火葬을 마치면 해당 관청에 명하여 타고 남은 유골을 묻고 능을 두며 시위侍衛할 관리와 능을 지킬 민호民戶를 정하여 각 절기[歲時]마다 제사를 받.. 2024. 1. 14.
서희와 강감찬, 그 공통분모 강동6주 두 사람은 막연히 한 세대 정도 차이나는 줄 알았지만, 실제 생몰년을 비교하면 서희徐熙가 942~998년이고 강감찬姜邯贊은 948~1031년이라 불과 여섯 살 차이라, 실상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 두 사람 사이가 뜨게 보이는 까닭은 저들이 역사에 두각을 드러낸 고려와 거란간 전쟁에서 주역이 된 시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서희가 그의 이름을 영원히 아로새긴 계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993년, 요 성종聖宗 통화統和 11년, 고려 성종成宗 12년, 요나라가 소손녕을 총대장으로 하는 고려 정벌군 80만 대군을 일으켰을 때라, 이때 서희는 적진으로 혈혈단신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려 이른바 강동6주(강동육주)를 획득했다. 같은 문신인 까닭에 둘은 비슷한 관로를 거쳤다. 강감찬은 성종 3년, 983년에 과거 급제해 ..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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