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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왕의 부인임에도 능陵에 묻히지 못하다

by 버블티짱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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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의 축, 임금 현종顯宗(992~1031)에게는 13명의 왕후와 후궁이 있었다. 

그중 원목왕후元穆王后 서씨徐氏(?~1057)라는 이가 있다. 이천 서씨로 내사령內史令 서눌徐訥(?~1042)의 딸이고, 세 치 혓바닥으로 거란 군사를 되돌린 서희徐熙(942~998)의 손녀다.  

현종과 1022년(현종 13) 혼인하였으니 아마 1000년~1005년 어간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종보다는 26년을 더 살았다. 그가 죽자 문종은 이런 명을 내린다. <고려사> 후비 열전을 보면.....

문종文宗 11년(1057) 5월에 죽자 ... 또 제制를 내려 명하기를, “흥성궁주興盛宮主의 화장火葬을 마치면 해당 관청에 명하여 타고 남은 유골을 묻고 능을 두며 시위侍衛할 관리와 능을 지킬 민호民戶를 정하여 각 절기[歲時]마다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하였다. 

'흥성궁주'란 1022년 현종과 혼인한 숙비淑妃 서씨에게 내려진 칭호다.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하게 한 게 눈에 띄는데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력이 컸음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화장한 뒤 산골散骨하지 않고 묻어서 무덤을 만들고, "시위侍衛할 관리와 능을 지킬 민호民戶"를 두게 하였다는데 고구려 광개토태왕비의 수묘인守墓人 대목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를 받들어 시행해야 할 중서문하성에서는...

중서성中書省에서 〈이에 대해〉 아뢰기를, “엎드려 살피건대, 을미(乙未, 1055) 12월의 판지判旨에, ‘경흥원주景興院主 귀비貴妃를 문화대비文和大妃의 예에 의거하여 장사지내되 그 능호는 없애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모두 선왕[聖考]의 비이니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追孝] 예에 따라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흥성궁주는 후사가 없어 상께서도 이미 상복을 입지 않았으니, 능호를 없애고 각 절기에 제사 받드는 것을 그만두기를 요청합니다.”라 하였다. 

경흥원주는 현종의 후비 원순숙비元順淑妃 김씨(?~1055)를 가리킨다. 

'원순숙비'란 칭호는 죽고 나서 내려졌고 생전엔 '경흥원주'라고 불렸던 모양인데,

이를 문화대비, 곧 고려 성종成宗(960~997)의 후비 문화왕후文和王后 김씨(?~?)의 예에 의거해 장사지내되 '능호는 없애도록' 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문화왕후, 원순숙비 모두 화장을 했고 특히 원순숙비는 무덤이나 단소壇所 같은 시설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 예를 따른다면 흥성궁주도 굳이 무덤 봉분을 만들고 제를 지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후사가 없어 상께서도 이미 상복을 입지 않았"던 상황임에랴. 

능호를 없앤다면? 화장한 뼈를 빻아서 뿌려버리거나 항아리에 담아 어디 묻고 평평하게 했다는 이야기일테다. 

(<정조어찰첩>을 생각하면 아마도 중서성의 이 요청도 문종이 유도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건 너무 나간 것 같고) 문종은 이를 못 이기는 척 따른다. 

<고려사> 후비열전 원목왕후 서씨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制를 내려 이를 따르고, 시호諡號를 내려 원목왕후라 하였다.

아마 원목왕후가 문종과 혈연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이런 결론이 났으려나?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현종 후비 원목왕후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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