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정약용13 Made in Japan을 쓰시던 동래부사 부산은 일본과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부터 어떤 식으로든 일본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작이 부산진 전투였던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임진왜란으로부터 200여 년 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아버지 친구인 참판 윤필병(1730-1810)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바친다. 윤필병은 동래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던지라 동래부사로서의 모습을 형상화하는데...붉은 줄 그어진 미농지에다 시를 베끼고 詩寫米農紅搨紙에도의 녹자 술잔에다 술을 따라주누나 酒傳江戶綠瓷杯- 권3, 시, 시를 적는 '미농지'가 뭔가 하면 (아마 써보신 분이 있지 싶은데) 먹지를 대고 뭔가를 베끼거나 문을 바르는 데 쓰는 꽤 두꺼운 종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기후현岐阜縣 미노美濃 지방 특산물이라 '미농지'.. 2024. 8. 3. 정조는 근대적 존재인가 항상 그것이 의문이었다. 정조는 근대적 인물인가. 정조의 주장은 당시 집권 서인의 사유의 대척점에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정조는 같은 이야기를 사대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군왕의 입장에서 한 것 뿐이다. 같은 소리다 결국엔. 근대성을 함유한 정조가 반근대적인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어 한국이 결국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공상이다. 둘 다 반동적이다. 다산? 근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 다산의 어디가 근대적이라는 것인가. 18세기 조선사는 바닥부터 다시 써야 한다. 2024. 1. 23. 다산학과 당파성의 문제 내가 일전에 임진왜란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각본으로 삼는 절대 근거가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 두 가지라 했거니와, 이에서 비롯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들 두 저술이 철저히 당파성에 뿌리를 박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를 토대로 하는 드라마 영화는 철저히 류성룡과 이순신을 절대 善으로 그리며, 정치상에서 이들과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덮어놓고 악인의 화신처럼 그리기 마련이다. 다산 정약용. 이 문제에서도 이와 똑같은 문제가 빈발한다. 다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든 드라마나 책, 심지어 학술서적이라는 것도 볼짝시면 열에 아홉이 철저히 다산 중심주의로 일관한다. 이런 글을 보면 정조에게는 마치 믿을 만한 신하라고는 정약용 뿐인 듯하며 나머지 우수마발은 개xx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 .. 2023. 7. 23. 핍박받은 지식인의 표상 다산 정약용 지금 우리한테 익숙한 다산이라는 상품을 만든 일등공신은 박석무 선생이다. 요즘도 메일링 서비스를 하시는지 모르나 이 양반은 다산에 미쳐서 사시는 분이다. 다산에 대한 각종 글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그것을 각종 매체를 동원해 효율적으로 전파한다. 다산 제일의 전도사인 셈이다. 한데 이런 그가 다산에 경도된 계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다름 아닌 광주민주화운동과 밀접하다는 점이다. 박석무 선생은 익히 알려졌듯이 이 운동의 기획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한동안 도피생활을 한다. 이 도피생활 와중에 다산에 더욱 침잠하게 되는데 당시를 회상한 각종 글을 보면 다산의 처지에 자신을 투영했음을 볼 수 있다. 이때의 작업들은 창작과비평을 통해 공간되기에 이른다. 박석무 선생 사례를 일반화하기엔 위험성.. 2023. 7. 23. 정약용 유배 해제 로비스트는 아들 정학연 2008.05.14 07:05:02 13년간의 일기 성도일록 '성도일록'으로 본 조선..1821년 콜레라로 '아비규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정조시대 승승장구하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후견인 정조가 타계한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휘말려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를 떠난다. 다산 자신은 내심 얼마 뒤 풀려나겠거니 기대했겠지만 설마하던 유배생활은 무려 18년이나 이어졌다. 그가 복귀한 것은 1819년. 다산은 어떻게 유배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아무도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던 이런 의문이 경기도박물관이 최근 전면 공개한 조선 순조 때 관리 신현(申絢.1764-1827)의 일기 성도일록(成都日錄)을 통해 밝혀졌다. 전체 분량 15권 15책. 1808년(순.. 2023. 1. 30. 다산 같은 이는 그보다 백년 전에 나왔어야 하는 사람 퇴율退栗 이후 정다산까지 흐른 시간이 250년 정도 된다. 정다산은 원래 활동한 시기(1762~1836)보다 100년은 빨리 나왔어야 하는 사람이다. 영조 연간에 이미 정다산이 활동하고 있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다산 정도의 이야기는 18세기 중엽에 이미 끝내고 그 시기부터 그 다음이 준비되었어야 조선이 희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다산은 딱 그 정도 포지션인데 여기에다 근대화의 선구라는 무거운 갑옷까지 입혀 놓고 이를 20세기 한국의 근대화에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사상사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시도이다. 물론 정다산을 이렇게 정의해 버리면 조선후기와 20세기 대한민국 사이에는 심각한 단절이 오겠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을 억지로 분칠하여 모실 수는 없는 노릇 .. 2023. 1. 17.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