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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9

유홍개庾弘蓋, 이규보가 건진 고려의 제주 지방관 나 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한 인물이 있다. 유庾씨인 것을 보아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예인 평산 유씨 아니면 무송 유씨였을 게고 과거에 급제했거나 음서로 출세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건 제주濟州에 지방관으로 부임했다는 것 말고는 업적이건 뭐건 알려진 것이 없는데 만약 후집에 그에게 보내려 한 이규보의 시가 실리지 않았던들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른다. 제주에서마저 잊혀진 그 이름 유홍개여. 지평선 저 너머 머나먼 길 전송할 때 / 漫長路垠送遐征 눈물 어린 깊은 정감 스스로 알겠네 / 淚墮方知自感情 - 시랑(侍郞, 여기서는 이수李需란 이다)이 태수를 전별하는 정감을 말한다 파도 잔잔하니 무사히 바다를 건널 테고 / 瀾涉穩堪尋過海 술이 얼근해지니 자꾸 잔을 권하려네 / 酒傾醺好更斟觥 천성이 옹.. 2023. 7. 11.
무관에서 경찰까지,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들의 특징 1. 제주 현지인들을 제주 지방관으로 본격 기용(?)하는 것은 빨라도 헌종, 철종 때쯤부터다. 그 전엔 거진 다 육지에서 왔다(영조, 정조떄 조금씩 나타나기는 하지만서도). 제주인이라 하더라도 상피제는 얼추 지켰던 것 같다(가령 제주목 사람을 대정현감 시킨다던가...). 2. 관서, 관북 사람이 제법 지방관으로 많이 온다. 그 시절의 서북청년(?)인가...차별받던 지역 사람들인지라 격오지로 돌린 것일까? 반대로 제주 사람들이 관서나 관북 지방관으로 간 사례도 있을 법한데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3. 대개는 무과 급제한 무관들이 목사 또는 판관, 현감으로 오곤 한다. 4.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No.1을 '도사島司'라고 불렀다. 근데 이 사람들은 모두 경찰 출신이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고 경부, 경.. 2023. 5. 7.
진상하는 말이 죽어 파직된 경주 최부자 집안 제주 정의현감 1. 지금의 성읍민속마을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정의현이라고, 제주 남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고을의 읍치邑治가 있었다. 조선 태종 때 고을을 만들고 조정에서 현감縣監을 파견해 다스렸다. 2. 정의현감을 지낸 사람들 중에 뒷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과 등을 뒤적거려보는데, 흥미로운 분을 만났다. 현종 때 정의현감을 지냈던 최국성(崔國成, 1626~?)이라는 분이다. 3. 이 분은 경주慶州가 본관이고 경주에 살았다. 경주의 경주최씨라...뭔가 생각이 날듯말듯해서 찾아보니 정말로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과 관계가 있는 분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1대 최진립(崔震立, 1568~1637)의 동생 최계종(崔繼宗, 1570~1647)의 손자이고, 2대 최동량(崔東亮, 1598~1664)의 당질(최.. 2023. 5. 7.
18세기 유배객 아들이 증언하는 제주성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이라는 어른이 계셨다. 경상도 안동 내앞 분으로 평생 벼슬한 적은 없었으나 효행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30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이 그 스승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을 변호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가 국문을 받고, 제주 정의현으로 유배된다. 이에 김낙행은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까지 따라가 1년 남짓 같이 지낸다. 이때 제주성 정경을 장편시로 남겼는데, 제목이 "제주성의 모습을 기록하여 돌아와서 아버님께 올리다〔記濟州城形 歸呈大人〕"이다. 18세기 중엽 제주읍성 내외의 모습을 제법 구체적으로 그린 내용이 재미있어 소개한다. 번역은 우선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의 것을 옮기나, 추후 다듬어보고자.. 2023. 4. 1.
제주의 DDP, 성산 고성리 아파트 제주는 조선시대에 고을 세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목濟州牧·대정현大靜縣·정의현旌義縣 이렇게 고을 세 곳으로 제주 땅을 새롭게 편제한 것이다. 이를 제주 삼읍三邑이라 한다. 개중 정의현 중심지 읍성은 본래 성산 일출봉 근처에 두었다. 하지만 너무 치우쳐 백성들이 불편해하고, 또 왜구라든지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7년 만에 자리를 옮기니 지금의 성읍민속마을이 바로 정의현 읍성 자리다. 그렇다고 옛 읍성을 당장 헐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금도 성산 고성리古城里에 고古정의현 읍성 자취가 남아있다고 해서 (올해 박물관에서 낼 책에 사진을 실을 겸) 답사를 와 보았다. 보고서에는 북쪽 벽이 꽤 뚜렷하게, 높고 길게 남아있다고 했는데 내가 초행이라 그런지 찾아가기가 너무.. 2023. 3. 2.
제주도 오미자가 참 맛있더구만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훗날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은 지금의 동문시장 근처에 살았다. 제주 유배살이에 그런대로 잘 적응을 했던 모양인지, 그의 문집 곳곳에는 제주 사람들과 소통한 흔적이 남겨져 있다. 그때도 동문시장이 있었다면 아마 시장을 드나들며 국밥 한 그릇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애초 충암 본인이 트인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주변 환경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던 모양이다. 제주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도 그런 호기심의 소산이라고 해야겠다. 관심이 없었으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그 중엔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의 토산물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오직 토산물로는 표고버섯이 가장 많고, 오미자五味子도 많이 나는데, 씨가 아주 검고 커서 마치 잘 익은 머..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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