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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무관에서 경찰까지,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들의 특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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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현지인들을 제주 지방관으로 본격 기용(?)하는 것은 빨라도 헌종, 철종 때쯤부터다. 그 전엔 거진 다 육지에서 왔다(영조, 정조떄 조금씩 나타나기는 하지만서도). 제주인이라 하더라도 상피제는 얼추 지켰던 것 같다(가령 제주목 사람을 대정현감 시킨다던가...).

2. 관서, 관북 사람이 제법 지방관으로 많이 온다. 그 시절의 서북청년(?)인가...차별받던 지역 사람들인지라 격오지로 돌린 것일까? 반대로 제주 사람들이 관서나 관북 지방관으로 간 사례도 있을 법한데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3. 대개는 무과 급제한 무관들이 목사 또는 판관, 현감으로 오곤 한다.

4.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No.1을 '도사島司'라고 불렀다. 근데 이 사람들은 모두 경찰 출신이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고 경부, 경시급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 온다. 이것이 경찰국가(?) 탐라국...?

 

제주 관덕정


*** Editor's Note ***


강군이 지적하는 제주 특징이 꼭 제주만이 아니라 왕화王化의 외부로 치부된 지역의 그 시대 공통 현상이다.

무관인 이순신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그것이 저 시대 과거 출신 문관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저런 자리조차 문관들이 먹기 시작하면 무관이 설 땅이 없다.

이는 그만큼 문관을 배출하는 통로가 좁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랬기에 저런 자리를 채울 만한 자리까지 문관을 배출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작동시킨 힘이다.

왕화 밖을 문관들이 가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권력밖으로의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왕화 밖은 그만큼 위험을 상시노출하는 지역이라 작은 사건 하나로도 걸핏하면 직위해제였고 무엇보다 중앙정치무대에서의 기억 상실을 의미했다.

단, 왕화 밖은 모험의 땅이기도 했으니 무관들로서는 벼락출세의 기회를 보장하는 땅이었다.

그 기회가 아주 드물었고 또 그 기회가 파직으로 연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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