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풍납토성은 한성백제, 나아가 백제를 증언하는 제1 유산이지만, 이것도 1990년대 이후 이야기이며, 그 전에는 존재감은 미미하기 짝이 없어, 그 남쪽 동생 몽촌토성에 견주어서도 형편없었다.
그런 풍납토성이 지난 30년간 전세를 완전히 역전해 백제를 통털어 넘버원 유산이 되었으니, 그에다가 내가 작은 힘 하나 보탰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조금은 있다.
이는 풍납토성이 발굴조사를 통해 그렇게 드러났기 때문인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풍납토성이 발굴조사를 통해 속살을 드러낸 시점은 그보다는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올해는 풍납토성이 발굴조사를 통해 존재를 보고한지 딱 한 주갑이 되는 해다.
1964년 10월 16일부터 같은 달 31일까지 보름 동안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유일한 교수 김원룡은 재학생들을 데리고 고고하 야외 실습을 하게 된다. 그 실습 대상으로 고른 지점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그게 당시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풍납토성은 허허벌판 한강 범람지구였던 까닭이다.
그 공식 보고는 1967년 이뤄졌으니 이렇게 해서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가 쌓은 성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하지만 당시 발굴이 지금은 트렌치 조사로 일컬을 만치도 되지 아니해서 구덩이 파다 만 수준이지만 건질 것은 다 건졌다.
심지어 당시 이 조사를 통해 한성백제에서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와까지 수습했으니 말이다.
고고학 실습을 통해 드러난 풍납토성은 너무나 존재가 미미했다. 무엇보다 조사단장 김원룡도 시굴조사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연구자였지, 정책가가 아니었다. 그걸 토대로 삼아 그 전해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된 전체 구역을 사적으로 묶었겠지만, 그는 책략가가 아닌 천상 연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원통하지마는 그래도 풍납토성 지금이 있기에 만든 계기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고비 중 하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조사자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서울대박물관에 관련 자료가 있을 것이다. 작년에 나는 그 계약직 임시 관장 권오영 선생한테 간곡히 부탁했다. 내년이 풍납토성 60주년이니 관련 행사 좀 준비해 주시라고 말이다.
오늘 다시 확인했다. 짐짓 위협조였다.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실은 걱정스러웠다.
"잘 준비하고 계시겠지요?"
오잉?
잘 준비하고 계시댄다. 하나 더 보탰다.
"내년은 을축년대홍수 100주년입니다."
이 말은 풍납토성 발굴 60주년 의미에다가 홍수 문제도 보태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역시 권오씨는 판단이 빠르다.
"홍수 문제를 보태면 이야기가 더 풍부해지겠네요."
기대해 보자. 이제 현직 교수질 3년 남은 말년 병장의 풍납토성 축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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