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필암서원5 서원지의 부정확성, 필암서원의 경우 송준길의 《동춘당집》 권16에는 〈장성(長城) 필암서원(筆巖書院)을 옮겨 세우는 고유문 -이 서원은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을 모셨다.-〉이 실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원우(院宇)의 지세(地勢)가 좋지 못하므로 오래전부터 옮겨 세우기를 논의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장마에 크게 파손되었기에 상의한 결과 모두 동의하였으므로 추산(秋山) 아래에 있는 중등촌(重登村)으로 옮겨 세우고자 하여, 감히 그 사유를 고합니다" 라는 짤막한 내용이다. 이 기록과 기왕의 《필암서원지》 기록을 종합하면 기산리-증산-중등촌-현위치인 해타리(海村)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첨부한 지도에서 보듯 중등촌은 지금의 중동 마을이다. 몇해 전 나는 심곡서원 역시 관련 기록을 통해 중창 연도 등이 잘못되.. 2023. 5. 23. 필암서원이 품은 봄 그곳 벗 양모 선생이 장성 필암서원을 오늘 찾았다며 하서를 감도는 봄 물결을 담아 잔뜩 보내왔다. 필아 또 고디 국물 같고 전날 첩집에서 지새곤 마누라한테 야구방맹이로 얻어터져 생긴 궁댕이 멍자국 같은 하늘이다. 하릴없이 이끌린 모양이라 봄은 끊지 못한 담배요 이제 맛본 메탄펨타민이라 중단이 있을 뿐이요 단절은 없으니 기왕 이기지 못할 유혹이라면 흠씬 빠제봄이 어떨까 하노니 가야겠다 마져 못본 서울의 봄 맞으러 남도로 가야겠다. 2021. 3. 11. 나이롱 연세 은행나무 여기에 대해서는 김 단장도 몇 번 포스팅을 했고 나도 몇 번 포스팅을 했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수령은 붙이는 놈 마음이다. 워낙에 속성수라 4,50년만 지나도 몇백 년으로 퉁치기 적당하기 때문이다. 용인 심곡서원 은행나무도 정암선생 심은 게 아니라 최소 19세기 이후에 심은 것이라는 포스팅도 했고, 담양의 인조대왕 계마수라는 후산리 은행나무도 원래 계마수는 18세기까지 감나무였다는 것도 포스팅한 바 있었지만, 저 두 종의 나무는 죄다 거짓말투성이다. 나이테 측정도 쉽지 않거든. 장성에서 절반쯤은 나를 일자무식 수준이고 애향심도 없는 놈으로 취급한다. 장성이 추진한 것들에 일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던 까닭이다. 지금도 '장성의 최순실'이라고 불린다는 어떤 이가 광주의 지인이나 장성의 지인에게 씹고 .. 2021. 1. 12. 김우급金友伋(1574~1643) 필암서원에서 저녁에 읊다[筆院暮吟] 필암서원에서 저녁에 읊다[筆院暮吟] 저 멀리 숲에는 어슴푸레 이내 앉았고 遠樹微茫生暮烟 푸른 모래톱 흰 자갈 사이 긴 물줄기 青沙白石間長川 내 봄 시름 노래를 들어줄 사람 없어 無人聽此春愁曲 홀로 숲에서 서산에 걸린 해를 보노라 獨倚林間看日懸 김우급(金友伋, 1574~1643) 여기서 말한 필암서원은 장성읍 기산리에 있었던 것을 이른다. 장성문향고등학교가 최초의 필암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필암서원은 장성군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다가 1Km 북서쪽 황룡면 필암리 증산(甑山) 아래로 옮겼다가, 필암리 추산(秋山) 아래 중등촌(重登村: 현 중동)으로 또 옮겼으며, 마지막으로 오늘날 위치인 해타리[海村]로 옮겼다. 2020. 11. 21. 필암서원 마룻바닥에 배깔고는 맘도 급하고, 시간도 촉급했던 장성행 이번 주말 정도 예정한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그 대상지 중 한 곳인 이곳 필암서원을 지나칠 순 없었다. 이곳 토호 행주기씨 호철 선생이랑 상경하는 길에 잠깐 들렀다. 세계유산이라한들 그것이 일취월장하는 것은 아니로대 그래도 그 직전 모습은 담아두고팠다 해둔다. 뭐 이렇다 하게 달라졌거나 달리 보이지는 아니한다. 너무 자주본 여파리라. 마룻바닥 널부러져 요모조모 기간 담아보지 못한 컷 포착하려 버둥버둥하지만 다 그게 그거라 환장할 노릇이다. 이럴 땐 흑백으로 돌려보는 게 최고라 그 모드 놓고 박아보는데 글쎄 어떤 차별도 보이지 않아 더 분통이 터진다. 할 수 없이 바닥 찰싹 붙어 눌러보는데 이 짓도 여러번 시도한 까닭에 그닥 흥이 나진 아니한다. 널부러져.. 2019. 7. 3.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