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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식영정기(息影亭記)〉 기호철 원문 교정하고 번역하며 해설함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식영정기(息影亭記)〉 1. 원문 息影亭記 金君剛叔吾友也,乃於蒼溪之上,寒松之下,得一麓,構小亭,柱其隅,空其中,苫以白茅,翼以凉簟,望之如羽盖畫舫,以爲吾休息之所,請名於先生。先生曰:“汝聞莊氏之言乎?周之言曰‘昔者畏影者,走日下,其走愈急而影終不息,及就樹陰下,影忽不見。’夫影之爲物,一隨人形,人俯則俯,人仰則仰,其他往來行止,惟形之爲。然陰與夜則無,火與晝則生,人之處世亦此類也。古語有之曰‘夢幻泡影’。人之生也,受形於造物,造物之弄戲人,豈止形之使影?影之千變,在形之處分,人之千變,亦在造物之處分。爲人者當隨造物之使,於吾何與哉!朝富而暮貧,昔貴而今賤,皆造化兒爐錘中事也。以吾一身觀之,昔之峨冠大帶出入金馬玉堂,今之竹杖芒鞋逍遙蒼松白石,五鼎之棄而一瓢之甘,皐夔之絶而麋鹿之伴。此皆有物弄戲其間..
정민하(鄭敏河, 1671~1754)〈식영정기(息影亭記)〉 번역 및 해제 : 기호철 ( 독학하는 장성 독거노인 ) 해제 : 담양 식영정기는 그간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쓴 기문만 언급되는 일이 많다. 임억령이 사위인 김성원(金成遠)의 정자를 빌려 몇 년 사용하다 고향 해남으로 돌아가 쓴 〈식영정기(息影亭記)〉는 그 나름으로 식영정 역사를 논할 때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지만, 실은 그것이 말하는 식영정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식영정과는 무관하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풍모가 크게 변했다. 임억령 시대 식영정은 이후 언제인지 사라지고 200년 가까이 그곳은 빈터로 남았다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4)의 후손들이 식영정 터를 매입해 정자를 새로이 짓고 중건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식영정과 직접 연결된다. 식영정 중건기를 송강..
조선 숙종 임금이 읊은 북한산성시 6수 번역 : 기호철 ( 장성 독거노인) 임진년(1712, 숙종 38) 4월 10일에 숙종(肅宗)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행행(幸行)하여 성첩(城堞)을 두루 관람하고 천혜의 험준함에 감탄하며 시 6수를 지었다. 1. 전쟁에 대비해 마련한 새 산성에 행행하려새벽에 나선 남문엔 북과 나팔 울려퍼지네용맹한 기병 수천명 대오 나누어 호가하니훈훈한 바람에 해는 길어져 여름이 되었네 計深陰雨幸新城曉出南門鼓角嗚驍騎數千分扈蹕風熏日永屬朱明 2. 서문 초입에서 한번 고개 돌려 돌아보니기운솟고 뜻 웅장해져 내 근심 사라지네도성 지척에 금성탕지 같은 성 굳건한데어찌 우리 백성 지키는 서울을 버리겠소 西門初入一回頭氣壯心䧺寫我憂國都咫尺金湯固何棄吾民守漢州 3. 어렵사리 십리 가서 행궁 이르니 우뚝한 시단봉 바로 아래 동쪽이라 노적봉 꼭..
주희(朱熹) <매화를 읊은 절구 두 수[梅花兩絶句]〉 매화를 읊은 절구 두 수[梅花兩絶句] [南宋] 주희(朱熹, 1130~1200) / 기호철 譯 개울가 매화꽃도 이미 피었으련만 溪上寒梅應已開 친구는 한 가지 꺾어 보내질 않네 故人不寄一枝來 하늘 끝에 어찌 향기론 꽃 없을까 天涯豈是無芳物 무심한 그대 향해 술잔을 든다오 爲爾無心向酒杯 깊은 골짜기에 졸졸 시냇물 흘러가고 幽壑潺湲小水通 초가엔 보슬비 오는데 대울도 없구나 茅茨煙雨竹籬空 울 가 매화나무엔 꽃이 흐드러졌는데 梅花亂發籬邊樹 앙상한 가지에 붙어 북풍 원망하는 듯 似倚寒枝恨朔風
주희(朱熹, 1130~1200) <세모[殘臘]〉 세모[殘臘] [南宋] 주희(朱熹, 1130~1200) / 기호철 譯評 겨울 끝자락에 봄볕이 생겨나고 殘臘生春序 지루한 궂은비 세밑이 다해간다 愁霖逼歲昏 꽃망울 곱고도 산뜻한 꽃 피우고 小紅敷艶萼 갖가지 신록이 해묵은 풀 덮도다 衆綠被陳根 깊은 골짝 샘물이 졸졸 흘러오니 陰壑泉方注 들판 물은 콸콸 흐르려 하는구나 原田水欲渾 농가에서는 봄농사 때 닥쳐오니 農家向東作 온갖 일들이 사립문에 모여드네 百事集柴門 《주자대전》 권1에 수록된 시다. 연말에 봄이 다가오는 농촌을 담담하게 읊은 시이다. 3행 소홍(小紅)은 연분홍빛 꽃망울을 이르는 말이다. 6행 혼(渾)은 큰 물줄기가 흐르는 의성어이다.
김조(金照 1774~1853), 〈수연사에 들어가며 [入隨緣寺]> 수연사에 들어가며 [入隨緣寺] [朝鮮] 김조(金照 1774~1853) 인적도 없는 산에 앉으니 홀연 나도 없는 듯 정신이 피곤해 책도 내던지고 은거를 꿈꾼다 해질녘 돌아가매 매미 울지 않아 적막하고 하늘 높이 떠가는 기러기는 홀로 날아간다 인적 없는 창에 해 비치니 불로장생 비결이요 무너진 담에 꽃 피었으니 틀림없는 수묵화네 지금 돌아갈 동계마을 동쪽 몇 리면 되는데 그대 좋은 시상 떠올랐다고 오라고 손짓하네 空山坐我忽如無, 神倦抛書夢五湖. 落日歸來蟬寂寞, 長天浮去鴈高孤. 虛窓日暎金丹訣, 破壁花生水墨圖. 此去東溪東數里, 君詩有得手相呼. 수연사(隨緣寺)는 전라남도 장성군 영축산(靈鷲山)에 있던 유서 깊은 사찰이며 수연사가 있으므로 그 산을 수연산(隨緣山)으로 일컫기도 한다. 水蓮寺(수련사), 秀蓮寺(수련사..
효명세자가 읊은 자명종 자명종(自鳴鍾) [朝鮮] 효명세자(孝明世子·1809 ~ 1830) 누가 가르쳐 쉼없이 절로 돌며하루 열두시각 맞춰 종을 치더냐예부터 천문관측에 창조가 많아 공교함은 서양사람 따를 수 없네 誰敎不息自行輪, 一日撞鍾十二辰. 從古測天多造化, 巧工莫似西洋人. 《학석집(鶴石集)》에 수록되어 전한다. 자명종이라는 저절로 울리는 종이라는 뜻이니, 시계를 말한다. 조선 인조 9년(1631) 7월,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라는 이름의 사신단 일원으로 파견된 정두원(鄭斗源)이 양놈 육약한(陸若漢)한테서 선물로 받아왔다는 데서 한반도 자명종 역사는 시작한다. 소명세자 당시에는 그에서 한참이 지났지만, 그래도 서양 문물에 대한 생경함이 남았다.
서거정이 말하는 내장산 백양사 단풍철이다. 그런 대명사로 내장산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 내장산에 백양사가 있다. 조선초기 사가정 서거정의 다음 증언은 현재의 내장산 백양사 내력 중 고려말~조선초 일단을 증언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당시에는 백암사라 일컬은 백양사가 실은 행촌 이암 집안 고성이씨 원찰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 성격이 언제까지 지속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가정 당대까지 100년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을 소홀히 보아넘길 수는 없다. 이는 당대 불교사를 고찰할 때도 여러 문제의식을 고취하거니와, 불교가 일방적인 탄압대상이었다는 데 대한 반론 역시 요즘 만만치 않거니와, 불교가 그리 호락호락하니 당하지는 아니했다. 강고한 유교사회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효용이 있었으며, 특히나 가정 주도권을 장악한 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들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