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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연구1940

새로 읽는 책: 《文明としての江戸システム》 금명간 새로 읽게될 책으로 《文明としての江戸システム 문명으로서의 에도 시스템》 日本の歴史19 (講談社学術文庫)이다. 물론 저자 혼자 읽는 것은 아니고, 일본문화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아가며 읽는다. 저자는 鬼頭 宏. 에도시대의 사회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설명해 놓은 책으로 필자의 전공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기회가 되면 일독 후 소감을 나중에 써보겠다. 2022. 12. 28.
굳이 역사 관련 이야기를 블로그에 적는 이유 최근에 필자가 여러가지 역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적는 이유는 심심풀이 삼아 적는 것은 물론 아니며 앞으로의 연구작업과 관련이 있다. 향후 작업에는 문헌 사학의 성과를 크게 반영하고자 하는데 외연을 확인하고자 하는데 주 목적이 있다. 간혹 이야기가 빗나가 너무 멀리 가기도 하는데 양해가 있기를. 다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작업과 많이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며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될 것이다. 결국 학문의 최종 목표는 스토리텔링이며 (올해 노벨의학상이 왜 네안데르탈인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 고대 DNA연구자는 이번 수상자 외에도 많았다) 스토리텔링에는 역사학 만한 것이 없다. 필자도 이제 나이 50대 중반을 넘어서 회갑을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연구전체를 꿰뚫는 스토리.. 2022. 12. 27.
한국 고대사의 기록이 빈약하게 된 것은 통일신라에 제대로 된 역사서 한권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이때 뭐라도 나왔으면 이름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쯤 뭐라고 그 편린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삼국사기를 쓸때 김부식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대로 편찬된 관찬서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시기, 일본에는 소위 6국사가 편찬되었는데 이 시기 편찬된 사서 권수는 무려 190권에 달한다. 삼국시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통일신라 기록은 뭐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 시기 기록은 내가 보기엔 관찬사서가 있었는데 태워먹은 게 아니라 편찬을 아예 안 한 것이다. 한국 고대사 문헌의 빈약함을 김부식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든 한글자라도 더 남겨보려고 애쓴 그의 입장에.. 2022. 12. 25.
구스노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1294~1336)와 칠생보국七生報國 앞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남목정성 楠木正成 (1294~1336)에 대한 게시물이 있어 간단히 써 본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앞에 설명 된 대로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에 대한 불멸의 충성심의 상징으로 제국 신민이 된 일본인들사이에서 거국적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인기는 최고다. 그에 반해 이 사람과 맞서서 이기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재평가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가끔 나오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대역적"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군을 분쇄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카우지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다. 무사들이 천황군을 박살내고 보내버린것은 자기가 처음도 아니고 그 전에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메이지유신의 시대에 볼수 있는 것과 같은 천황에.. 2022. 12. 25.
조선전기에는 마운령비의 존재를 몰랐을까? 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이렇게 되어 있으니,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이때도 비 자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 세종은 왜 윤관비를 두만강 너머에서 찾고 있었을까? 이 비를 고구려 비로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신라비라고는 감히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2022. 12. 23.
고려사에 나오는 진흥왕 순수비 앞서 윤관 북벌이 미친 지역이 진흥왕 때 순수비가 서 있는 지역 안쪽과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 보면 이를 시사할 만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 윤관이 정벌하여 획득한 땅에 대한 설명이 그 열전에 이렇게 나온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 만하였다. 본디 고구려 소유로 옛 비석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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