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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1795

Silla Monument in Bongpyeong-ri, Uljin Trespassing the police line to encounter Silla Monument in Bongpyeong-ri, Uljin at the Museum of Silla Monument in Bongpyeong-ri, Uljin Having been buried for a long time, this stele is much effaced and is thus difficult to decipher accurately, but it seems that it was erected in 524,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Beopheung(514-540) of Silla Kingdom(57 B.C.- A.D.935). 2018. 4. 3.
천흥사지 오층석탑 절터는 계절에 따라, 그리고 같은 계절 같은 날짜라 해도 새벽이나 아침이냐 오후냐 저녁이냐에 따라, 나아가 기상에 따라 빗속이냐 눈발이 날리느냐 혹 미세먼지에 날리느냐에 따라 오만가지 색상으로 갈아입는 팔색조, 아니 만색조萬色鳥라.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천안 천흥사지(天興寺址)라는 절터는 내가 2013년 10월 21일, 가을이 숨을 헐떡이며 이제 겨울을 맞이할 무렵 오전에 찾았으니, 내장한 촬영시점을 보니 오전 7시54분이라, 아마도 이슬이 채 마르기 전이리라. 이제 풀과 나무는 눈에 띄게 누른 빛을 띠기 시작하니, 깻잎 역시 숨을 죽이지 않고도 저려 담가도 그대로 좋을 듯한 색깔을 발산한다. 들녂엔 봄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은은함을 풍기는 들꽃이 그런 대로 듬성듬성 피어올라, 갖은 상념을 자아낼 때이.. 2018. 4. 3.
Hwangryongsa and me At the Hwangryongsa Temple site on the drone taken by Seyun Oh 2018. 4. 1.
조조고릉(曹操高陵) Cao Cao Mausoleum 안양고릉(安阳高陵) 혹은 위고릉(魏高陵) 혹은 서고혈2호묘(西高穴2号墓)라고 하며, 동한(东汉) 말년(末年) 위왕(魏王) 조조(曹操·Cao Cao·155~220 CE)의 능묘다. 고릉(高陵)이란, 위 무제 조조가 죽어 묻힌 무덤을 말한다. 曹操陵墓 소재지는 지난 2천년간 미궁이었다가 2009年 12月 27日 하남성문물국(河南省文物局)이 안양시(安阳市) 안양현(安阳县) 안풍향(安丰乡) 서고혈촌(西高穴村) 일대라고 확정 공포하고, 그에 따라 중국국가문물국(中國国家文物局)을 통해 조조묘임이 굳어졌다. 2010年 2月 4日, 조조 고릉은 하남성 제5차 비준 문물보호단위(文物保护单位)가 되었다. 후한 왕조 권력을 장악한 曹操는 후한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 유협(劉協)한테서 건안(建安) 21년(21.. 2018. 3. 28.
Cultural Heritage Vandalism, the Tragedy of Pungnaptoseong Fortress 2000년 5월 13일은 주말인 토요일이었다. 휴무일인 이날 나는 풍납토성과 송파경찰서에서 온 종일을 보냈다. 그날 오전 9시쯤, 풍납토성 한복판쯤에 위치한 경당연립주택 아파트 재개발 예정지 발굴현장에서 발굴현장 무단 파괴라는 초유의 사태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저 사진은 당시 발굴현상 참상을 전하는 연합뉴스 보도사진이다. 내 입사 동기로 지금은 언론계를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한 양현택 군 작품이다. 그는 이날 내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해 저 사진을 찍어 발행한 것이다. 보다시피 발굴현장은 포크레인 자국이 선명하다. 포크레인을 동원한 아파트 재건축 조합장이 이날 오전 8시30분쯤인가 현장에 들이닥쳐 당시 지상에 노출된 유구 중에서도 9호 구덩이라는 대형 유구 하나를 작살냈다. 오른쪽 사진 귀퉁이에 일부 노.. 2018. 3. 27.
2001년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 무령왕릉 발견․발굴이 30년을 맞은 2001년, 나는 ‘’을 마련하고, 동년 6월 18일 ‘한성을 등진 어린 왕자’를 시발로 동년 7월 21일 ‘무령왕릉과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총 15회에 걸쳐 관련 기사를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했다. 무령왕릉 발굴 저간의 이야기로는 그 발굴 책임자였던 김원룡의 몇 마디 사죄성 언급과 조사단 일원인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에 의한 간단한 정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써 무령왕릉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에 벼르고 벼르다 이 특집을 생각했던 것이니, 이 특집이 공간된 이래, 이곳저곳 출처도 없이, 무령왕릉 발굴비화라고 해서 이들 기사가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이제는 급기야 그것을 정리한 뿌리조차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풍찬노숙 시절에 .. 2018.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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