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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귀주대첩] (10) “도통은 소배압, 부통은 소허열” 지금까지 본 전쟁은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더 정확히는 그것을 정리한 조선초 이데올로기)이며, 이 전쟁이 거란 쪽에서는 어찌 기억되었을까? 그 흔적은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紀와 이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 열전에 남았으니 이를 살펴야 한다. 이 전쟁이 요사에서는 권16 본기 제16 성종聖宗7에 남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1018년, 고려 현종 9년은 거란으로서는 개태開泰 7년이라, 이해 3월 신축辛丑에 동북쪽 월리독越里篤과 부아리剖阿里·오리미奧裏米·포노리蒲奴里·철려鐵驪 등 5개 부部에 대해 세공歲貢으로 초피貂皮 6만5천 장과 말 300마리를 바치게 했다 하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는 그 연말에 있을 고려 정벌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들 5개 부는 동북쪽이라는 위치를 특정하는 것으로 봐도 .. 2024. 2. 23.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 2024. 2. 23.
[귀주대첩] (8)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이상한 전쟁 소손녕이 이끈 1차엔 80만, 성종이 친정한 2차엔 40만을 동원했다는 거란이 1018년 현종 9년 12월에 단행한 3차엔 고작 10만을 끌고 왔으니 규모로 보아 거란으로서는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건 다른 측면에서 봐얄 성 싶다. 거란으로서는 이 무렵 내부 사정으로 저 이상 되는 군대를 징발하기 힘들었다고 보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십만은 당시로서는 전면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이 삼차전을 귀주대첩이라 하나 실상 이 전쟁은 최전방 흥화진에서부터 개경 근방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잇따랐으며 실상 귀주대첩은 그 마지막 승리를 말할 뿐이다. 이듬해 2월 1일 귀주대첩까지 3개월에서 약간 모자란 이 기간에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고려는 완승했다. 특히 .. 2024. 2. 23.
[귀주대첩] (7) 전쟁 직전 강감찬의 동태 948년 생인 강감찬은 70세에 도달한 1017년 정월에는 정년 퇴직하거나, 정년퇴직하고 싶다는 사표를 던졌어야 한다. 나는 틀림없이 강감찬이 저 시기에 저랬다고 본다. 그것을 현종은 반려했다. 다만, 사서에서는 누락됐을 뿐이다. 그건 현종으로서도 강감찬을 따로 써 먹을 데가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를 간접 증언하는 흔적이 고려사 현종본기와 고려사절요에 모두 보인다. 한창 전운이 감도는 현종 9년 1018년 5월, 현종은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로 삼는다. 서경유수 겸 내사시랑평장사다. 서경유수는 외직이고 내사시랑평장사는 내직으로 재상이다. 한데 서경유수를 임명하면서 그 임명장 뒤에다가 현종은 이상한 말을 쓴다. “경술년(1010) 중 외적의 침입[虜塵]이 있게 되자 창과 .. 2024. 2. 22.
[귀주대첩] (6) 3차 고려거란전쟁의 미스터리들 거란과 여진인 내투來投가 이어지는 어수선한 상황은 이미 예고한 3차 고려거란전쟁이 어느 쪽으로 승리가 기울지를 암시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연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친 이 전쟁은 그 요란한 선전과는 달리 실상 거란이 동원한 군사가 그네들 기준으로 10만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그네들 일방 선전이라 실상 참전 규모는 더 적었다고 봐야 한다. 전쟁의 제1 홍보 조건은 뻥, 개뻥치기였다. 전쟁 홍보의 핵심은 성과는 과장하고, 피해는 숨기거나 최소화한다는 데 있다. 한 명 죽여놓고 백명 몰살했다 하고 백명 죽었는데 두 명 죽었다고 하는 짓거리는 러시아랑 우크라이나아 한 판 붙은 저 전쟁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무튼 자칭 10만이라는 거란군을 막고자 고려가 동원한 군대가 놀랍게도 갑절이나 많은 20만.. 2024. 2. 22.
[비형랑과 화랑세기] (3) 양자로 즉위한 김춘추 : 생부는 갈문왕, 양부는 대왕大王 갈문왕이 종말하고 추봉 대왕이 등장하는 획기를 나는 김춘추 즉위에서 찾는다. 김춘추의 등장은 중국식 예제가 한반도에 착근하는 계기였다. 이런 중국식 대왕 추봉 바람에 갈문왕이 대표하는 소위 고유 신라 추봉 시스템은 도전에 직면했다. 김춘추한테는 생부와 양부가 따로 있었다. 그는 양자로 즉위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용춘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과 사도思道 사이에서 난 둘째아들로 동부동모同父同母 형이 용수龍樹다. 춘추는 용수가 천명天明 공주에게서 낳은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작은아버지 용춘에게 가서 자랐다. 용춘은 천명을 아내로 받아들이는 한편 적자嫡子가 없어, 형의 아들인 조카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 춘추는 양자養子로 작은아버지에게 입적되었다. 화랑세기에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춘추는..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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