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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귀주대첩] (13) 노복 터진 강감찬 강감찬은 빌빌 쌌다. 948년, 고려 정종定宗 3년에 태어난 그는 빌빌 싸다 서른여섯 중늙은이가 다 된 983년, 성종成宗 2년에야 최승로崔承老가 시험감독관 총대장이 되어 실시한 과거 시험 갑과甲科에 강은천姜殷川이라는 본명으로 등단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나이에 견주어 출세는 굉장히 늦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주장하는 조정 대세에 맞서 홀로 몽진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계속 빌빌 쌌다. 이렇다 할 요직을 지낸 적도 없다. 이런 그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단하기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전운이 한창 감돌던 그 무렵, 현종은 지난날 몽진, 곧 일단 튀고 보자 전법을 제시한 강감찬을 기억하고는 그를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나아가 서북면을 지키는 총.. 2024. 2. 24.
[귀주대첩 spinoff] 요사遼史 이국외기二國外記가 적록한 귀주대첩 원나라 때 편찬된 요사遼史는 24사 혹은 25사 중에서도 그 졸속성이 가장 심각하다는 비판을 듣거니와, 실제 내가 통독해 봐도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이상 가는 거란 통사는 지구상에 없다. 이 요사는 외국열전이 독특해서 유독 고려와 서하西夏 두 나라는 이국외기二國外記라 해서 별도로 독립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만큼 거란 국제교류사에서 두 왕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막강한 까닭이다. 물론 거란한테 가장 중요한 이웃 왕조는 宋이었지만, 그 송은 본사가 따로 있으므로, 이렇게 두 왕조만은 따로 독립해서 이렇게 특기한 것이다. 이 이국외기 중 고려를 보면, 두 왕조가 전쟁을 비롯해 교류한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정리했으니, 그 요긴함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에는 당연히 우리가 흔히 귀주대.. 2024. 2. 24.
[요사遼史 서하西夏 열전] (1) 요사에 대하여 요사遼史는 원나라 때 탈탈脫脫이 주도해서 편찬한 거란 요나라 시대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이른바 “24사二十四史” 중 하나로 들어간다. 지정至正 3년, 1343년 4월에 편찬이 개시되어 이듬해 3월에 완성되었으니, 불과 1년 만에 편찬이 되는 바람에 여러 모로 결점이 많은 사서로 분류된다. 탈탈脫脫이 편찬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를 맡은 가운데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과 하유일賀惟一,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게해사揭奚斯, 여사성呂思誠이 총재관總裁官이 되고 염혜산해아廉惠山海牙 등이 수사관修史官을 맡았다. 전체 116권이요, 개중 황제 편년체인 본기本紀가 30권, 각종 제도사인 지志가 32권, 표表가 8권, 열전列傳이 45권이다. 기타 특이하게도 거란어를 풀이한 〈국어해國語解〉가 1권을 이룬다. 요遼 태조太祖 야.. 2024. 2. 24.
서하西夏가 끌린다 거란을 대하다 보면 모름지기 서하西夏를 매양 조우하는데, 이 서하는 거란이 한창 흥성하던 시절에는 물론 거란을 종주국으로 삼으면서 송과는 거란에 대해 같은 처지이면서도 시종 송과 치고 받는 모습을 연출한다. 거란 중심으로 보면 남쪽 송, 동쪽 고려, 서쪽으로 서하과 고창회골高昌回鶻을 접하거니와, 거란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물론 저들이 주변 외신外臣 제후들이었다. 다 거란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때마다 공납을 했고, 그네가 올 때마다 책봉이라는 이름으로 그 군주를 봉하는 형식을 빌렸으니, 저 무대가 훗날 몽고 제국 판도 아래 하나로 합쳐졌으니, 그러고 보면 몽고의 꿈을 참말로 장대했다. 거란이라 해서 왜 저들 지역을 모조리 정복할 수 없었겠는가? 다만, 그네들은 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는 한 그 자치를.. 2024. 2. 24.
[귀주대첩] (12) 넘쳐나는 과부와 고아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거란에 준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공식으로는 1019년, 개태開泰 8년 2월에 종식되었지만, 그 수습은 그해 내내 계속됐다. 그해 3월, 수뇌진을 처벌한 거란 성종 야율륭서는 그해 6월 무자戊子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전몰한 장교의 자제들을 조사한 데 이어 그달 을사乙巳에는 남피실군교南皮室軍校 등이 고려를 토벌한 공이 있다 해서 금백金帛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요사 성종본기) 이것으로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같은해 가을 7월 기미己米에는 고려를 정벌하다 전몰한 여러 장수의 처한테 조칙을 내려 봉록을 더해주게끔 한다. (요사 성종본기) 물론 이 전쟁이 참혹한 거란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그들로서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감출.. 2024. 2. 24.
[귀주대첩] (11) 대패한 소배압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야율륭서 앞서 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을 주요 전투 장면을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했다. 이를 다시금 상기하면 고려 현종 9년, 1018년 12월 10일 거란군은 흥화진에서의 서전 이래 대략 3개월을 곳곳에서 판판이 깨지다가 이듬해 2월 1일 귀환 길목 귀주에서 대패하고 군사 대부분을 읽고서 수뇌부 몇 명을 포함한 일부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한데 이 전투 사정이 요사 遼史 성종聖宗 본기에서는 개태開泰 7년, 1019년 12월에 날짜를 특기하지 아니한 채 한 순간 전투에서 대패한 것으로만 적었을 뿐이다. 고려 쪽 기록과 비교할 때 요사 쪽에서는 거란군 패전을 부러 축소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전쟁에서 진 일이, 더구나 한참 아래로 본 고려한테 개발살난 일이 무..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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