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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291

대하드라마가 천년 뒤 대한민국에 소환한 거란 거란인 AI와 쟁투를 벌이며, 나도 그림으로 존재감 각인해보겠다는 강민경 선생 그림이라 TV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소환한 거란인 전형의 모습이다. 이 드라마가 그리는 거란 남성은 전부 저 모습인데, 놀랍게도 거란인들이 남긴 벽화 같은 회화 자료를 보면 진짜로 거란 남자들은 저랬다. 자연 대머리도 있을 테지만, 저처럼 머리카락은 양쪽 정수리 부근만 꼬랑지처럼 남겼으니 그런 모습은 천상 독수리머리 그것이라, 아마도 용맹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징표였으리라 본다. 귀걸이를 했으며, 코는 전부 매부리코라, 이는 인종학적 특징 아닌가 싶다. 앞 사진은 적봉에서 발견된 거란 벽화 무덤 한 장면이라 하는데, 앞서 소개한 적이 있거니와 이것이 어떤 계층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거란 남자들 사정을 엿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2024. 1. 10.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4) 화랑세기 자매편 상장돈장上狀敦牂과 선화 화랑세기 필사자인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 유작 중에 겉표지에 ‘상장돈장上狀敦牂’이라 쓴 족도族圖가 있다. 이 역시 필사본으로 화랑세기 시대, 화랑세기 주요 등장인물들 족보를 그림으로 묘사한 문헌이다. 화랑세기와 같은 필사지인 실록편수용지를 이용한 필사본으로, 제목의 상장돈장은 고갑자古甲子니, 우리에게 익숙한 십간십이지로 표시하면 경오庚午다. 이 경오년은 실록편수용지와 박창화의 서릉부 근무 시점을 고려할 때 1930년이다. 따라서 상장돈장은 이 족도를 박창화가 필사, 혹은 완성한 시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상장돈장은 왜 중요한가? 첫째, 풍월주를 필두로 하는 화랑세기 주요 등장인물의 모든 계보가 나온다. 이 계보는 그 선대는 물론이고 후손 관계도 빠짐없이 수록됐다. 둘째, 이 상장돈장을 통해 현.. 2024. 1. 10.
장례식 조문객과 사찰 낙성 축하객 (2) 축하와 조문은 일란성쌍둥이다 국가지대사는 수십 가지가 있으나 이를 크게 다섯 가지로 서브카테고라이제이션 하니 일러 오례五禮라 한다. 이 경우 禮는 예의범절 manner가 아니라 리추얼ritual이다. 다시 이 오례는 그 대상에 따라 축하 경하할 일이면 길례吉禮라 하고 애도 조문할 일이면 흉사凶禮라 하는데 왕의 즉위식이나 왕의 죽음이 각기 전후자를 대표한다. 문제는 길례없는 흉례없고 흉례없는 길례없다는 사실이다. 즉위식만 해도 꼭 죽음이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임자의 퇴직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으니 앞선 왕이 죽어야 새로운 왕이 즉위하지 않겠는가? 쿠데타에 의한 강제퇴위? 말 장난에 지나지 아니해서 그것 앞선 왕의 죽음이다. 따라서 둘은 실상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아서 실상 세트로 움직인다. 한비자가 갈파했듯이 죽음은 곧 누군가에게는.. 2024. 1. 9.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3) 미륵사 봉영사리기로 잃은 것과 얻은 것 미륵사지 석탑 출토 봉영奉迎 사리기舍利記 공개는 고대사학계를 일대 후폭풍에 휘말리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무왕의 왕비라고 생각한 선화공주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가 가야 할 자리에는 느닷없이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따님’이 정좌定座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부여夫餘에서 남하한 온조 일파가 세운 왕국인 까닭에 왕족은 ‘부여씨夫餘氏’가 독점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사탁씨沙乇氏를 필두로 하는 다른 성씨가 권력을 주무르는 시대로 접어드는 양상을 뚜렷이 보인다. 봉영사리기奉迎舍利記에 의하면, 지금의 미륵사는 무왕의 왕후王后가 창건했으며, 그 왕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의 딸이다. 사탁적덕의 사탁沙乇은 요즘의 제갈씨諸葛氏나 남궁씨南宮氏처럼 두 글자를 사용하는 복성復姓이며, 적덕績德은 이.. 2024. 1. 9.
화랑세기가 아니라도 다 알 수 있다는 포석정 ‘포석정鮑石亭 다르게 보기’는 화랑세기가 몰고 온 중대한 변화 중 하나다. 종래 포석정이라면 딩가딩가 음주가무하는 장소로 알았다. 그것은 삼국사기 신라 경애왕본기 4년(927) 조가 저록한 다음 사건이 발단이었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공격하니, 임금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령하여 굳센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때 임금은 왕비, 후궁 및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어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임금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여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 2024. 1. 9.
1971년 6월 2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공사 허가 무령왕릉 발견의 신호탄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허가 1971년 6월 2일 오후 2시, 문화재관리국 회의실에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7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참석자는 문화재위원으로 조명기 손보기 최희순 정인국 임창순 이기백 김원용 김유선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전문위원 1명, 정재훈 백동호 김상봉 장경호 사무관, 김선배, 정기영이 참석했다. 사회는 조명기, 간사는 장인기, 서기는 김재겸이었다. 보고사항으로 '문화재 보수 설계검토'가 있었고, 그 두 번째 안건으로 '공주 공산성 고분군 보수공사'가 상정되었다. 그 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심의 결정: 원안대로 가결함 2) 보수내용 : (1) 5.6호분 봉토 해체 강회 다짐 (2) 5,6호분 배면 암거 (3) 6호분 석축 개축 (4) 6호분 ..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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