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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31

신랑감은 역시 힘이 있어야? 처녀가 고른 남자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제6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에 한 처녀가 있어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개중 어떤 이는 신랑감이 문장을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다 하며, 어떤 이는 못 아래 좋은 논이 수십 경頃 있다 하며, 또 어떤 이는 신랑감이 정력[陽道]이 장성壯盛하여 거시기에다가 돌을 담은 주머니를 걸어놓고는 흔들어서 머리를 넘긴다고 했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의 의사를 표시했다.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활쏘기 말타기 잘하면 전사하기 쉽고 못 아래 논은 홍수나면 쓸려가기 쉽고돌주머니 머리 넘긴다니 내맘에 쏙 드네” 2018. 2. 16.
수릉壽陵, 자기가 만든 자기 무덤 2017년 2월, 경주 傳 황복사지 인근을 발굴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미완성 왕릉을 발굴했다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한 조사성과를 공개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가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그런 용어가 싫다 해서 가릉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는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그것이 왕릉에 대한 버전이 가릉일 것이므로, 그 명칭이 가릉이건 가묘건, 임시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 용어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분명 조사단에서는 저 무덤이 만들다가 어찌된 이유로 중단하고 폐기한 왕릉이라 해서 저리 이름을 붙였지만, ‘미완성 왕릉’이라 하는 편이 훨씬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 2018. 2. 11.
재검토해야 하는 오키나와 이모가이 신화 가야 조개장식 말갖춤새, 오키나와 인근 조개류 껍질 확인 (남경문 기자, 뉴스1, 2017.08.16) 전제하지만, 이런 반론 혹은 이의 제기에 내가 그 뚜렷한 반론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얘기는 나는 누차 환기 차원에서 지적했거니와 새삼 다시 정리한다. 위 첨부 파일 기사를 보면,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소위 조개류가 오키나와 근해 산이라고 한다. 오키나와 인근 해역산이라는 이런 조개류가 신라 무덤에서도 나오고, 기타 가야 지역 고분에서도 나온 것으로 안다. 한데 이를 오키나와산이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누가 그런 이야기를 발설하기 시작했으며, 그 검증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가? 저런 조개 껍데기가 한반도 삼국시대 고분, 특히나 신라나 가야문화권에서 나오기만 하면, 오키나와 산이라는 믿음이.. 2018. 1. 21.
조선시대 구제역 미암 유희준 글 모음집인 미암집 제1권 시(詩) 칠언율시(七言律詩)에는 '소 전염병을 탄식하며〔牛瘴嘆〕'라는 제하 시가 있으니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해엔 역병으로 죽음을 탄식했는데 / 去年曾歎疫虔劉올핸 양기 성해 괴이타 무슨 연유인가 / 今又愆陽怪㡳由누런 송아지 집집마다 네발 뒤집히고 / 黃犢家家顚四足백성들은 날마다 두눈에서 눈물 흐르네 / 蒼生日日泫雙眸곤궁한 백성아 밭 거칠까 두려워 마라 / 窮民休怕田爲穢현명한 수령이 응당 칼을 소로 바꾸리니 / 賢守應敎劍化牛연일 내리는 눈발 더더욱 기쁜 까닭은 / 更喜飛霙連日降풍토병 거둬주고 맑은 바람 펼쳐서라네 / 爲收瘴氣布淸飀 나는 이것이 구제역인지는 모른다. 다만 증상으로 보아 구제역 일종임은 분명하다고 본다. 전통시대에도 소 전염병을 전하는 기록이 더러 보.. 2018. 1. 21.
EUR(에우르), 무솔리니가 꿈꾼 '영원의 도시(Eternal City)' 로마를 위한 신도시 1928년 그의 자서전 끝자락에서 마침내 내가 듣고자 하는 무솔리니 육성을 얻었다. 나는 수도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로마는 이탈리아인의 마음에,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친애하는 영원한 도시다. 그곳은 로마제국 시절에 위대한 도시였다. 그리고 보편적인 빛을 간직해왔다. 그곳은 기독교의 역사적 왕좌이자, 포교의 중심이었다. 로마는 선구적 운명과 역사적 분위기를 가진 도시다. 그곳은 새로운 이탈리아의 수도다. 그곳은 기독교의 왕좌다. 그곳은 전 세계에 법률과 예술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미래에도 역시 가르칠(317쪽) 것이다. 나는 이 장대한 수도를 미술적으로 아름답고, 또 지도자에 의해서 정치적 질서와 부여된 도시로 만드는 데 필요한 재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오스티아Ostia의.. 2018. 1. 21.
이화여대박물관 뿌리는 상허 이태준 저명한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이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하기는 1932년 4월. 해방 직전까지 이 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부임한) 그 당시 이화여전은 문과, 가사과, 음악과 등 3개 학과뿐으로 학생 수는 200명도 채 못 되었다." 나아가 "정동 시절의 이화여전 교수진은 여자가 많았고 남자 교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남자로는 "문과에 월파 김상용과 한치진(철학), 김인영(성경), 그리고 나, 이렇게 넷뿐이었고, 가사과에 장기원, 김호직, 음악과에 성악가 안기영이 있었다. 상허 이태준은 나보다 2, 3년 뒤에 들어왔다" 일석이 회고하는 상허 이태준은 이랬다. "상허는 월파와는 달리 술은 그리 즐기지 않았으나 얼굴 모습이 유난히 준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깨끗해서 특히 여성.. 2018.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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