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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원(池津媛. 이케쓰히메. いけつひめ) 개로왕 시대 어느 백제 귀인의 딸인 듯한데, 일본 천황에게 채녀로 받쳐졌다가 천황이 아닌 다른 남자와 정분을 통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죽은 때는 458년 7月27日~8月24日로 추정된다. 日本書紀 雄略天皇 二年 七月 : 웅략천황雄略天皇이 마침 불렀는데 이시카와노타테(石河楯. 석하순. いしかわのたて)과 정을 통하는 중이었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오토모노무라야(大伴室屋大連. 대반실옥대련. おおとものむろや)에게 詔하여 쿠메베(来目部. 래목부. くめべ)를 보내 이들 부부의 사지(四肢)를 나무에 묶어 桟敷에 놓고는 불로 태워 죽이게 했다.日本書紀 雄略天皇 二年 七月 : 백제신찬百済新撰에 말했다. 기사년(己巳年)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했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礼奴跪. あれなこ)를 파견해 여랑(女郎. ..
적계여랑(適稽女郎. 차쿠케이에하시. ちゃくけいえはし) ☞지진원(池津媛. 이케쓰히메. いけつひめ)
모니부인(慕尼夫人. 무니하시카시. むにはしかし) 日本書紀 雄略天皇 二年七月 : 백제신찬百済新撰에 말했다. 기사년(己巳年)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했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礼奴跪. あれなこ)를 파견해 여랑(女郎. 에하시토. えはしと)을 바치라고 하니, 모니부인(慕尼夫人. 무니하시카시. むにはしかし) 딸을 분장시켜 적계여랑(適稽女郎. 차쿠케이에하시. ちゃくけいえはし)이라 부르고는 천황에게 받쳤다.
위문(魏文) ☞ 김위문(金魏文)
김위문(金魏文) 신라 성덕왕 시대 중시를 역임하고 관위는 이찬에 이르렀다. 원성왕의 조부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성덕왕 : 11년(712)…3월에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12년(713)…겨울 10월에 중시 위문(魏文)이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원성왕 : 원년 2월에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할아버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죽은 아버지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봉하였다. ☞흥평대왕(興平大王)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 이 글은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가 발간하는 소식지인 《박물관소식》 2002 3․4호에 ‘특별기고’ 형태로 투고한 글 전문이다. 석굴암을 감도는 유령이 있다. 국가주의와 국민주의가 응결된 국민국가주의라는 망령이 그것이다. 한국인은 석굴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TV는 장중한 애국가를 들려주며 그 배경으로 석굴암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이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다만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어봐야 한다. 석굴암을 ‘반만년유구한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를 이제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반추 과정이 왜 필요..
고려 예종 외모는 옥동자? 송 선화(宣和) 5년, 고려 인종 원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은 인종을 직접 만나고는 그 결과 보고서로 송 조정에 제출한 에서 왕해(王楷), 곧 고려 16대 임금 예종을 일러 이렇게 묘사했다.眉宇疏秀。形短而貌豐。肉勝於骨。이를 한국고전번역원 역본(김주희, 1994)에서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고 옮겼다.이 문제는 자칫 사자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으니, 뜻을 확실히 하고자 몇 가지를 찾아봤다. 먼저 '미우(眉宇)가 소수(疏秀)하다' 했으니 이것부터 해결하자.'眉宇'는 글자 그대로는 눈썹의 지붕 혹은 처마라는 뜻이니, 여튼 이마 부분을 말한다. 이를 중문사전에서는 "眉额之间。面有眉额,犹屋有檐宇,故称。亦泛指容貌"라 했으니, 애초에는 얼굴 부분에서..
해외문화재..그 약탈의 신화 대책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문화재라 해서 그것이 약탈이란 방식으로 나간 경우는 매우 드물고 실상은 합법적인 통로를 통해 반출된 것이 대부분이라 해도 도통 믿으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약탈당한 것으로 의심을 산다 해서 그것이 곧장 약탈로 치환되어 인식되곤 한다. 그렇지 않단 말 수십 번 수백 번 골백 번 해도 말귀가 도통 통하지 않는다. 서산 부석사 보살상만 해도 헛소리가 난무한다. 약탈? 약탈 의심? 그건 우리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 약탈당했다 해도 그 사실이 증명되지 않으면 말짱도루묵이다. 조선시대엔 대마도가 조선 일본 무역중개기지다. 두 나라 사이에는 국가 혹은 민간차원에서 수많은 물자가 오갔다. 요즘은 문화재라는 가치가 투여된 물품이 이 방식으로 교류됐다. 조선초기 일본이 매양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