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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마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일본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둘 다 士이다. 일본에서 士라고 하면 바로 사무라이를 가리킨다. 공경을 士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조선후기 한국의 선비들과 일본 에도시대 사무라이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전자는 벼슬 없이도 재지 지주로서 대대로 선비의 자격을 물려줄 수 있는데 반해 후자는 막부건 번이건 소속되어 직역을 받지 않는다면 사무라이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급제자에서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은 사실 사마시다. 사마시만 통과하면 향촌애서 재지지주이자 유력 사대부 집안으로 계속 존재할수 있었기 때문에.... 향촌에서 사마시만 통과하고 지주로 계속 살아간 이런 계층은 에도시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계층이다. 2024. 9. 17.
배고프면 학문도 없다 조선후기 그리고 에도시대. 임란 이후 불과 백년만에 홀라당 한일간의 학문수준이 역전되어 버린 것은 딴 것 없다. 조선이 못 살았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에도시대 저쪽 지식인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질과 양적으로 독서의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이다. 왜이겠는가? 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왜 몇 종 되지 않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겠는가? 돈이 없어 책 사보기에 넉넉치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고 배고프면 학문도 없다. 이것은 60 이후 공부를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경제적 곤란은 없고 책 사 볼 돈은 있어야 연구고 나발이고 되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 바빠서야 60 이후 연구고 나발이고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 연구가 왜 세계 최강이겠는가? 결국 경제적 부인 것이다. 주.. 2024. 9. 17.
부여와 고구려는 휴경을 극복했을까 앞에서 필자는 벼농사는 수전경작 때 외부로부터 매년 새로 유입 유출되는 논물로 인해 연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자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일부 수전의 경우 매년 연작이 가능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남만주 일대, 부여와 고구려는 어떨까. 여기는 논이 거의 없는 곳이었을 텐데 (고구려의 경우 평양천도 이전) 이들은 농사에서 휴경을 극복했을까. 거의 밭농사 일색일 텐데 휴경과 화전을 매개로 한 윤작을 극복하고 있었을까 부여와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하고 결국 남쪽의 국가가 승리한 이면에는 논의 연작에서 오는 생산력 제고가 과연 무관했을까 2024. 9. 15.
[잡곡재배 이야기] 도리깨질과 키질 by 신소희 기장과 조를 도리깨질했다. 자동차로 밟으면 편하다고는 하는데 그리하자니, 혹시라도 돌이 섞일까봐, 깨질까봐, 못하겠더라. 죽어라 퍽퍽..ㅡㅡㅡㅡ스트레스가 확 풀림 . 농사 시작하고 제일 어려웠던 게 키질이다. 어릴 때 오줌싸고, 소금 얻으러 다닐 때나 썼던 키로 불순물을 거르다니... 과학으로 따지면 비중차부터, 공기 역학이랑, 뭐랑... 아무튼 아몰라 하고 싶은 고차원적 원리인 거 같은데.. 왠지, 할머니들은 이거 다 잘할 거 같은데... 시골에도 의외로 이 키질 못하는 할머니가 많다. 박자 감각과 공기를 읽는 능력이 있어야하는데, 감있는 분들은 몇 번 가르쳐주면 쉽게 한다고 하고, 감없는 사람은 죽어라해도 거칠게 하거나 못한다고. 키질이 잘 돼면, 가벼운 불순물이 깔끔하게 날아간다. 키질.. 2024. 9. 15.
오리 뒷다리 바베큐 즐긴 이집트 고대 이집트인은 당연히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고 개중에서도 거위 요리를 매우 좋아했다. 이 나무 모형은 왼손에 들고 있는 거위 다리를 요리하려고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 그의 다른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어 앞에서 타오르는 불에 화력을 더하려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모형들을 무덤에 넣어 죽은 자들한테도 영생을 제공했다. 이 조각상은 제12, 13왕조(기원전 1980~1760년) 통치 기간인 중왕국 시대, 즉 3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이집트박물관(투린) 전시 중 저 오리뒷다리 고기를 백성들이 상식했는가는 다른 문제다. 저런 자료가 남았다 해서 모든 이집트인이 오리고기를 즐겼다? 2024. 9. 15.
1966년 4월의 조선일보 기사: 기마민족도래설 이것이 1966년 4월, 일본학계의 소식을 전하는 삼불 선생의 언급인데 이 기사에서 에가미 나미오 선생의 "기마민족도래설"이 소개되었다. 이보다 앞선 소식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신문 검색으로는 나오는 최초의 기사로 에가미 선생의 이 주장이 대중에 확산되면서 한국인은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통념이 1980년대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급속히 퍼져나갔다.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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