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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도스 dos-à-dos", 두 권을 하나로 묶기 위한 binding "dos-à-dos"라는 특별한 제본 유형의 책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제작되었다.네덜란드 출신 서지학도 에릭 크와켈 Erik Kwakkel 은 저들을 “샴 쌍둥이 Siamese twins”라고 부르는데 적절한 명명이라 본다.책들은 앞면이 다르지만 뒷면이 같다.두 권의 보완 책을 하나에 넣기 위해 일부러 도스-도스 바인딩 제본술을 사용했다.저 사진을 보면 도사도스는 원리가 간단해서 제1권 뒷면 카바를 제2권 앞면 카바로 삼은 것이다.***(이하 2024. 11. 27 덧붙임) 외우 이정우 선생도 이 일을 근자 아래와 소개했으니 새로운 내용이 많아 그 포스팅을 전재한다.중세 시대에는 독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두 권의 책을 함께 제본한 적이 있다. 한 권의 앞쪽 가장자리가 다른 권 중심 축에 접.. 2024. 5. 11.
5소경이 필요한 이유 통일신라시대 역사 공부를 하면 항상 나오는 것이 9주 5소경이다. 그런데 행정기관으로서 9주에는 주도라 할 중심지가 다 있다. 5소경은 9주 외에 따로 설치된 것이다. 왜 따로 설치했을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에도시대 일본의 지도다. 막부의 비공식 적대세력이라 할 도자마 다이묘들의 사이에 막부령과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땅을 박아 넣은 것이 보이는가? 저것은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다. 주변의 도자마 다이묘를 감시하기 위해서. 다시 신라의 9주 5소경을 보자. 5소경을 왜 저렇게 박아 넣었는지 이유가 보이는가? 5소경은 주변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통일신라판 "막부령, 신판다이묘, 후다이다이묘"나 다름없다. 그래서 5소경에는 신라 왕경처럼 6부를 설치하고 왕경의 사람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5소경은 신라의.. 2024. 5. 11.
필래 신전, 아스완 댐을 탈출한 고대 이집트 아스완 댐 건설로 수몰지구에 위치한 나일강변 필레 신전 the Temple Philae 을 어찌할 것인가?아부 심벨 사원도 같은 고민에 처했으니 둘은 모두 몽땅 뜯어 인근 높은 언덕으로 옮기기로 한다.이를 relocation이라 불렀는데 두 사원은 방식이 조금 달라 아부 심벨이 인근 다른 지역으로 이사갔다면 필레사원은 같은 지점에서 그 꼭대기로 들렸으니 저 그림이 그런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이건되지 않았음 저 그림처럼 이집트 신들은 물고기마냥 물만 마시고 있을 것이니 저걸 몽땅 수면 위로 들어올린 것이다.간단히 말해 허리춤에 있던 것을 머리 꼭대기로 들어올린 것이다.신전 주변으로 물이 차자 본래 강안 언덕이었던 신전 자리는 하중도 섬으로 변모했다.이것이 현재의 모습이다.저와 같은 이전 복원이 우리 문화.. 2024. 5. 11.
수몰 문화유산 구출 대작전 : 누비아 기념물 구조 국제 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to Save the Monuments https://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Campaign_to_Save_the_Monuments_of_Nubia International Campaign to Save the Monuments of Nubia - Wikipedia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960–80 relocation project in Egypt and Sudan The International Campaign to Save the Monuments of Nubia was the relocation of 22 monuments in Lower Nubia, in Southern Egypt and northern Sudan, between 1960 and 1.. 2024. 5. 11.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와 후삼국 일본 에도시대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도자마外様[외양] 신판親藩[친번] 후다이譜代[보대] 다이묘다. 이 중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집안 인척들이며 후다이 다이묘는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이전에 이미 도쿠가와 집안에 종사하던 집안 후예들이며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라라 이후에 도쿠가와 지배하에 들어온 집안들이었다. 도자마 다이묘라고 하지만 그 사정도 천차만별이라. 사쓰마와 조슈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도쿠가와 집안에 적극 협력하지 않아 완전히 눈밖에 난 집안으로 서쪽 끝에 말그대로 쳐박아 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에도시대 내내 도쿠가와의 중심지라 할 관동과 관서 일대에는 막부령과 신판, 후다이 다이묘가 배치되며 그 바깥쪽에 도자마 다이묘가 둘러싼 모양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도자마 다이묘가 집중.. 2024. 5. 11.
동전 품귀 전황錢荒은 조선시대에만 있었을까 전통시대 한국사는 구리가 없어 고민을 안 해 본 적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구리가 부족해 화폐량이 절대 모자라경제가 제대로 안 돌아갈 판이었다. 조선 선비 중에는 심지어 돈을 쓰지 말자고 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판이었다. 이를 전황錢荒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황은 조선시대에만 있었을까. 예를 들어 청동기시대는 어떨까. 전황이라는 말을 동전 부족이라 하다 보니 전황이지, 사실 구리 부족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청동기시대에는 구리 부족에 시달린 적이 없을까? 있었을 것이다. 한국사에서 청동검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많은 돌칼들은 이를 웅변한다. 청동으로 위세품 수요를 다 채우지 못하다 보니 돌까지 동원된 것이라 필자는 본다. 그런데-. 그러고도 모자랐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 .. 2024.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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