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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 높인다고 에코 반달리즘 막을라나? 주로 기후운동가 climate activists 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고자 유명한 문화유산 현장을 일부러 파괴 혹은 훼손하는 행위인 이른바 에코 반달리즘 eco-vandalism을 막고자 그 주된 공격 대상지인 이탈리아에서 그에 대한 벌금을 대폭 올리는 방향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고 한다. 19일 이탈리아 안사 통신을 비롯한 외신들 보도에 의하면, 이태리 정부는 이와 같은 행위로 인한 문화유산 훼손 행위에 대해서 최대 6만유로, 한국돈 현재 대략 8천만원에 이르는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이태리 하원에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이를 추진한 젠나로 산귈랴노 Gennaro Sangiuliano 문화부 장관은 "국가유산 존중 원칙이 제정됐다. 기념물을 훼손 손상하거나 혹은 다른 다른 방식으로 파괴.. 2024. 1. 19.
[대물大物 이야기] 거근巨根의 창시자 노애嫪毐 (3) 김치양의 대선배 이제나저네나 죽기만 기다린 아버지 소양왕이 재위 56년 만에 죽자 그 아들로 다음 보위를 이을 재목으로 점지된 태자 안국군이 즉위했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다 기쁨에 계워 그랬는지, 그는 재위 불과 1년 만에 죽고마니, 이를 효문왕孝文王이라 한다. 다음 보위는 당연히 자초 몫이었다. 안국군 아들로 볼품 없다 해서 조나라에 인질로 던져졌지만, 장사꾼 여불위가 장래를 보고 대투자를 감행한 안국군 아들 그 자초子楚 말이다. 죽은 뒤 그를 높여 장양왕莊襄王이라 하니, 그가 바로 시황제 아버지다. 자초는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해준 화양왕후를 화양태후로 높이는 한편, 그를 진짜로 낳아준 엄마 하희夏姬는 하태후라 해서 높였다. 다음으로 자초는 기원전 249년, 즉위와 더불어 자신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한.. 2024. 1. 19.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드라마 열풍이 만든 서울 강서구립 허준박물관 1. 연혁 1999년 10. 허준(구암)기념관 건립계획 수립 2000년 05.31 건립 부지매입 2001년 12.15 설계경기 공고 2002년 04. 설계경기 작품심사 및 당선작 선정 05.22 설계용역계약 12. 설계용역 납품 및 준공검사 2003년 02. 시공업체 선정 04.10 공사착공 2004년 11.20 건축준공 2005년 03.23 개관 04.29 개관기념 세미나 "한의학으로 본 감기" 05.12 「1종 전문박물관」등록(제13호) 06.30 개관 100일 기념행사 10.08 10만번째 관람객 입장 11.23 서울사랑시민상 '건축상' 수상 2006년 01.17 보물 2점 지정 03.23 개관1주년 행사 특별전 : 지리산 함양 약초전 학술세미나 : 「동의보감」의 역사적 철학적 고찰 07.27~28.. 2024. 1. 19.
영감님들과 젊은이들의 분업 공부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영감님들은 괜히 논문 한 두 편 더 쓴다고 젊은이들 일거리 뺏지 말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시기 바란다. 최신 기술로 프론티어에서 누비는 작업은 영감님들에게는 맞지 않다. 자신의 오랜 경험으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필자 생각으로는 이것도 쉽지 않다. 젊었을 때 뭐라도 자기 분야에서 충분한 전문적인 경험을 쌓는 데 게을리한 사람들은 늘그막에 큰 그린 그림그린다고 해봐야 뭐가 나올 리 없다. 차라리 그런 경우에는 놀아라. 이미 큰 그림 그리기도 늦었고 뭐 한다고 돌아다녀봐야 방해만 된다. 반면에 젊은분들의 경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그림 그린다고 이리 저리 섭렵하고 다니는 건 필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젊었을 때는 한가지를 깊게 파고.. 2024. 1. 19.
조선 막사발은 어디에서 왔는가 흔히 조선 막사발을 두고 무위 무념의 소산, 인위가 극소화된 자연적 미의 소산 등등으로 찬상하는 경우를 보는데, 무위 무념 자연적미, 인공의 극소화 이런 것이 조선중기 한국사에서 나올 수 있는 사상이 맞기는 맞는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나라 사상의 어느 구석에 무위 무념 자연, 인공미의 극소화 같은 흐름이 있었다는 건가? 이러한 흐름은 유교적 흐름이라기 보다는 외려 도교나 불교적 사상의 영향에 더 가깝다고 보는데 알다시피 조선은 여말선초에 불교를 이미 작살을 내놔서 이런 사상이 똬리를 틀고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 막사발이 나오던 시기. 흔히 이야기 하는 바 무위 무념 자연, 인공의 극소화 등등 막사발과 관련된 아니. 그 그릇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좋다. 그 그릇의 제작과 직접 관련.. 2024. 1. 19.
당신은 확신할 수 있는가 이 막사발의 미가 16세기 후반 조선의 미에서 나왔다는 것을-. 필자는 이 막사발이 조선의 미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막사발이 한국의 자랑거리가 됐건 뭐건 이걸 적어도 한국에서 찬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국사 전체 흐름 안에 막사발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당시의 시대적 흐름 어떤 부분에서 이런 그릇이 나올 수 있는지 이걸 규명해서 이 그릇 배경 설명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이런 주장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는 한, 물론 필자가 이런 주장한다해서 뭐 하나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필자는 이를 한국미술사의 일부로 인정할 수 없다.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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