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승장구하는 최광식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문화유산계로 국한해도 권력이동의 신호탄이었다. 유홍준 시대가 저물고 최광식 시대가 개막했음을 알렸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내실보다는 이른바 보여주기형 치적 쌓기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둘은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한다. 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꽤나 다르다. 그 스타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속성 일람표로 정리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다.
유홍준은 진위 확인은 불가능하나, 들리는 말로는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교체가 확정된 시기에도 연임에 욕심을 냈다고 한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고 알지만, 주변에서는 모두가 그리 말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이명박 예비 정부 실세로 통하던 이재오와 친분이 보통 이상이인 점을 비롯해 그가 여야를 넘나들며 구축한 인망이 보통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중에서도 이재오와는 감옥 동기로 안다. 이재오를 연줄로 삼아 그가 이명박 정부에서도 계속 문화재청장을 욕심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는 한국 문화재 업계의 앙드레 말로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하지만 그의 이런 꿈은 남대문과 함께 불타내리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코앞에 둔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이 화마에 휩싸인 와중에 유홍준이 그 직전인가 그 즈음에 대한항공인가 어딘가의 후원을 받아서 부인과 함께 외국을 나가 있었다 해서, 또 그것이 동아일보 단독보도 형식으로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면서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날까지 문화재청장으로 남으려 했던 유홍준의 꿈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명박 당선과 더불어 당시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이면서 같은 대학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인 최광식이 새정부에서 중용되리라는 관측은 이미 파다했다. 개중에서도 초대 국립박물관장 아니면 문화재청장에 임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결국 국립박물관장으로 낙착하기는 했지만, 그 공식 발표가 있기 전 나는 최광식과 통화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거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혹여 두 자리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박물관장으로 가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중간에 오간 말은 다 생략하고 그에 대해 최광식은 “왜 그러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박물관장이 폼내기는 좋고 문화재청은 복마전이라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고 기억한다.
한데 이 전화 통화에서 이상했던 점은 무슨 자리를 제의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그가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는 두 자리 중에 굳이 고르라면 박물관 스타일이지 문화재청장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최광식의 공직 인생은 이명박 정부 내내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2008년 이래 2011년 2월까지 3년 동안 박물관장으로 일하더니 느닷없이 문화재청장에 발탁되는가 싶더니, 청장으로 일한지 7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이명박 정부 사실상의 마지막 개각에서는 일약 제46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이런 일은 단군 이래 없었다.
나로서는 이들 세 기관 중에서도 전자 둘인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청이 주된 출입처였으니, 4년가량이나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로 더 없이 많은 교유가 있었다.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옮겨간 뒤에는 최광식은 나의 감시망을 벗어났다.
한데 연합뉴스라는 언론사로 국한할 때 조금은 지랄 맞는 점이 연합뉴스와 문화부 관계였다. 아다시피 연합뉴스는 국가기관통신사로 지정되면서 매출액 혹은 수입원 상당 부분(2016년 기준으로 33% 정도일 것이다)을 정부 구독료에 의지하는 판국에, 그것을 실제 집행하는 부처가 문화부라 문화부 장관은 연합뉴스에 대해서는 슈퍼울트라 甲이었다.
지금은 고려대로 복귀한 최 교수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 이전에는 만만하게 본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옮겨가서는 영 지랄 같은 ‘상전’으로 변모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문화부는 내 출입처가 아닌 까닭에 나로서는 슈퍼울트라 乙 행세를 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옮겨간 뒤 어떤 말로 최광식이 먹고 사느냐 문화부 직원들에게 물었더니 “법고창신法古昌新”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에도 저 말을 써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되, 그리 오용 혹은 남발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문화 정책을 총괄하는 장관 자리에 가서는 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썼다고 기억한다.
결국 이명박 정부와 운명을 같이한 그의 이런 행보는 노무현 시대의 총아 유홍준조차 꿈 꾸지 못한 일이었다. 유홍준은 애초 꿈이 문화재청장이 아니었다. 그는 박물관장이 되고 싶어했다. 이는 그 자신도 여러 번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박물관 주변에는 그의 안티 세력이 많았다. 그가 유력하게 노무현 정부 박물관장에 검토되고 사실상 내정 단계에 들어갔을 때 박물관 내부와 그 주변에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조직적으로 있었다. 그 총대를 그 얼마 뒤에 죽은 박물관 출신 미술사학도 오주석이 맸다. 오주석의 오마이뉴스 기고문 한 방에 유홍준 카드는 날아갔다.
이런 그가 와신상담 끝에 느닷없이 문화재청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화행정 서비스 기관이요, 문화부 2차 기관에 불과한 박물관에 견주어 문화재청장은 대통령 임명장 하나면 끝이었다. 반발이고 뭐고 할 수도 없는 구조다. 당시 문화부 장관은 정동채라고 기억한다.
한데 유홍준 문화재청장 카드는 정동채도 완전히 배제됐다. 정동채는 유홍준이 임명되는 날, 사후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유홍준 카드는 정동채에게도 그만큼 부담이었다.
문화재청은 독립 외청이라 하지만 조직법상 문화부 산하임에도 장관이 유홍준을 부담스러워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유홍준이 문화부 장관 말을 들은 척이라도 하겠는가? 실제 그의 청장 행보는 문화부 장관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최광식의 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 시절 그 권력은 문화재청장 시설 유홍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그는 곳곳에서 견제를 받았다. 같은 문화부 내부에서도 노골적인 통제를 받기도 했다. 이런 그가 그것들을 딛고서 일약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 (2016. 2. 23)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6) 철권통치자 이종철 (0) | 2023.03.14 |
---|---|
원효의 선물, 덕동댐 적석목곽분과의 조우 (0) | 2023.03.11 |
메모하는 습관, 이성시의 경우 (0) | 2023.02.24 |
자색紫色, 간색間色에서 絶大의 색깔로 - 지상의 천황天皇을 표방한 시조始祖들 (0) | 2023.02.23 |
하라파문명 라키가리 유적과 한국 고인류학의 만남 (0) | 2023.0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