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권 연구자나, 일본쪽 일부 연구자 중에는 메모가 일상화한 이를 가끔 본다. 이성시 선생도 메모광이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아마도 2000년대 아주 초반이라, 그 다리를 놓은 이가 일본근현대사 전공 박환무 형이었다.
요새야 이성시 선생이 무슨 국내 학회장까지 하던 시절이 되었으며, 그 무렵에 더러 한국을 왔다갔다 하며, 또 90년대 중후반인가에서는 1년짜리 연구년을 서울대에서인가 한 일도 있지만, 당시 서울대 잠깐 시절 이야기는 내가 프라이버시 때문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이성시 역사학은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 《만들어진 고대》를 계기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데, 이 책 발간을 계기로, 더 정확히는 그 책에 실린 광개토왕비에 대한 글로 그의 선생 무전행남武田行男한테서는 파문 비슷한 처지에 몰리기도 했으니, 그것은 선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다케다 스스로가 자랑하는 논문이 서너 편 있는데 개중 하나가 광개토왕비였으니, 그것을 엎어버린 것이다.
저 무렵은 김태식 전성기였는데, 겁대가리 없던 시절이라, 제아무리 대가라 통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나는 가리지 않고 그 허무맹랑한 설들을 비판했으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김태식은 무척이나 순해졌으니, 뭐 요새 더 심하다는 그런 말까지 하는 모양이나, 그래도 많이 참는다는 말은 해둔다.
또 이야기가 옆길에 샜다. 본론으로 돌아가 메모가 얼마나 연구자로는 중요한가 하니, 그 예화로 저 이성시를 들고 싶다.
이성시는 1951년생인가? 암튼 그럴 텐데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이나 많고, 명색이 와세다대 교수 아닌가? 그런 그한테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끊임없이 메모를 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서울을 오면 우리 공장 근처에서 묵는 일이 많았으니 올 때마다 거의 매번 하루이틀은 날밤을 까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자주 오른 이야기가 국내 역사학계 동향이었고 나머지는 학술토론이었다.
내가 내뱉는 말 중에 새길 만한 것들을 그는 끊임없이 메모했다. 그 일화 두 가지 정도를 소개한다.
하나는 진흥왕순수비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고대 문자생활사였다. 당시는 내가 저 순수비에 대한 파천황 방불하는 설을 제기한 논문을 백산학보에 발표하기 직전이었으니, 그 얼개를 내가 미리 공개했으니, 내가 왜 진흥왕순수비들을 봉선비 일종으로 보는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했으니, 그것들을 끊임없이 그는 메모했다. 나중에 듣자니 그 대화를 나눈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문자생활사라, 당시 그는 목간에 주목하던 때라, 그는 예의 a-a'-b-b'-c와 같은 동아시아 문자전파론을 확립해 설파하던 중이었고 이것이 나름대로 동아시아 고대사학계에 파란을 일으켰으니, 논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문자는 중국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현지화를 가미하고, 다시 그것이 넘어가 일본에서는 c가 된다는 이런 논리였다.
그 논지는 나도 지지한다. 다만, 그는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시대 금석문, 예컨대 봉평비니 냉수리비니 하는 것들을 신라 문자사의 초기 형태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발전해서 훗날 완연한 한문세계로 펼쳐진다는 이런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두만 해도 그런 초기 문자사를 증언하는 시각을 담고 있었다.
내가 정색했다. "당신은 저들을 초기문자사 자료로 보는데 틀렸다. 그건 문자생활이 고도에 접어든 이후의 유물들이다. 신라가 문자생활을 체득하고서 그것을 반석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나온 유물들이 바로 저 초기 자료라는 것들이다."
나아가 나는 진흥왕순수비문을 예로 들었다. "그 비문 완연한 중국식 한문이다. 금서룡이가 그래서 저건 신라인이 아니라 중국 귀화인이 썼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당신도 그리 보느냐? 나는 달리 본다. 신라는 이중의 문자체계가 있었다. 저건 귀신을 위한 문장이라 순한문으로 썼고, 다른 것들은 독자가 달라서 신라의 신민들이라 그들이 알아먹기 쉬운 문체로 쓴 것이다. 이것이 문자생활이 고도에 이른 증거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누가 독자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암튼 이런 논리였는데, 그것 역시 호텔방 메모지에 열심히 메모했다. 훗날 발표된 그의 논문을 보는데, 내가 말한 저 맥락의 요지가 들어가 있음을 보고는 무릎을 쳤다.
비단 나뿐이었겠는가? 그는 대화를 끈임없이 메모했고, 그 메모들을 통해 본인이 사색하고 검증했으며, 그런 과정을 거쳐 받아들일 만한 것들은 받아들여 이성시 역사학을 창안해냈다.
그 메모하는 모습을 나도 흉내 내 보려했지만, 여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효의 선물, 덕동댐 적석목곽분과의 조우 (0) | 2023.03.11 |
---|---|
[문화재 기자 17년] (14) 유홍준을 대체한 최광식 시대의 개막(1) (0) | 2023.03.07 |
자색紫色, 간색間色에서 絶大의 색깔로 - 지상의 천황天皇을 표방한 시조始祖들 (0) | 2023.02.23 |
하라파문명 라키가리 유적과 한국 고인류학의 만남 (0) | 2023.01.20 |
시체까지 남기곤 홀연히 떠난 합덕제 고니 (0) | 2023.01.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