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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6) 철권통치자 이종철

by taeshik.kim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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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우세스쿠였다. 그가 가는 곳엔 어김없이 절대왕정이 들어섰다. 그의 치하 국립민속박물관은 그의 말 한마디에 웃고, 말 한마디에 떠는 절대 왕국이었다. 공公이 곧 사私요, 사가 곧 공이었기에 시도때도 없이 쉬는 직원들을 불러냈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장인 천진기 역시 툭하면 주말에 호출을 받아 불려나갔다. 주말이면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는 이 철권통치자를 따라 조직 개편의 키를 쥔 행정자치부나 예산 편성을 주무르는 재정경제부 담당 사무관이나 국장 집을 찾아가서는 하염없이 문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후문에는 맘에 안 드는 직원들에게는 ‘조인트’도 깠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기가 많은 기관이나 부서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직원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 정성과 노력에는 혀를 내둘러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종철. 1962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입학생으로 함께 문화기관에서 같은 공무원으로 평생 잔뼈가 굵은 조유전, 지건길과는 학과 동기다. 셋 모두 공직 출발은 문화재연구실로 안다. 조유전 지건길이 이쪽 출신인 건 확실하지만 이종철의 전력에는 미심쩍은 대목이 있어 이는 추후 본인한테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다가 어찌해서 갈라져 조유전은 줄곧 그 자리를 지키다가 그 소장으로 자랑스럽게 퇴직하고, 지건길은 이내 박물관으로 말을 갈아타 나중에는 차관급 국립중앙박물관까지 했다.

 

고고학 아니면 미술사를 했어야 할 법한 이종철은 무슨 인연에서인지 민속학으로 정착했다. 이것이 본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는 물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동기간 충돌을 피하는 길이 되었다. 1968년 국립민속박물관 전신인 한국민속박물관이 출범하자 그 학예연구사가 된 그는 이곳에서 장장 13년을 관장으로 일한다.

 

민속박물관장은 두 차례 역임한다.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근무하다 1986년 10월 27일 민속박물관장에 처음으로 발탁돼 이래 94년 7월 5일까지 일하다가 국립전주박물관장으로 발령난다. 그러다가 98년 4월 9일 다시 민속박물관장이 되어 2003년 9월 13일까지 일하다가 곧바로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으로 옮긴다.

 

두 차례 민속박물관장 사이에 빈 틈바구니를 아이러니하게도 동기생 조유전이 채운다. 조유전으로서는 사실 국립문화재연구소 내부에서 밀려난 셈인데, 공교롭게도 이종철이 다시 복귀하자 그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화려하게 친정에 복귀한다.

 

그의 모든 생활은 공과 사가 구분없이 혼재하기에, 그리고 내가 맡은 기관을 최고로 키우자는 의욕이 너무나 앞섰기에 공무원 조직 문화에서는 그것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같은 공무원 조직이라 해도 자율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한국전통학교에서는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그는 교수들에게도 똑같은 복종을 요구하면서 조기 출근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들을 리 만무했으며, 학생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기숙사 생활을 강요했지만, “여기가 육사냐. 육사 같으면야 100% 취직이나 하지 우리를 책임질 것인가”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총장 시절 그는 30여 년을 헤아리는 그 이전 공무원 생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심한 좌절감을 경험했다. 사석에서는 “교수놈들”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튀어나왔다. 그만큼 교직 사회가 그가 꿈꾸는 최고의 대학을 향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든 행동에 사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에게 모든 사가 공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2016. 3. 14)

 

***

 

이에서 궁금증으로 남겨놓았던 몇 가지를 확인했다. 개중 그가 민속학을 택한 계기 혹은 동기니, 그는 애초 철학 국문학을 하고 싶었다 한다. 신생 학과 고고인류를 택한 건 주변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고고학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민속학 투신은 대학교 2학년때 서울대 국문학과인가 사범대인가에서 이두현 교수 강의를 들으면서였다고 한다. 그가 어제 내놓은 과거 사진을 보니 이두현 교수를 중심으로 그와 김병모 선생이 같이 찍은 초창기 시절 사진이 있더라. 

 

 


하지만 1968년 11월 1일 입사한 문화재관리국 초창기 시절, 그는 발굴현장에 자주 불려갔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경주 방내리 고분이 출현하자 현장으로 달려갔으며, 1970년 강릉에선 고분이 발견되자 그것을 발굴했다. 보고선엔 김정기 박사와 같이 이름이 올라 왜 그랬는지 물어보니 "이러다 내가 고고학을 천상 해야겠더라"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6년 졸업 직후, 그는 두 살인가에 아버지를 여읜 독자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군대를 갔다. 애초엔 해병대를 지원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입대 당일, 그는 해병대 대신, 논산훈련소 29연대로 갔다.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여서였다고 한다. 


그가 자원한 군대는 그가 원한 곳이 아니었다. 맨날 얻어터졌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는 입대 8개월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이런 그를 그의 선생 삼불 김원룡은 고고학도로 만들려 했다. 

 


어느날 삼불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전북대 송준호 선생이라 계신다. 거기로 가라."


장래가 보장되는 자리였다고 한다. 아마도 박물관이나 조교 조금 하다가 교수가 되는 그런 코스였나 보다. 하지만 주변과 상의한 결과 그는 결국 거부하고는 2년 동안 유랑생활을 한다.

 

"삼불은 내가 고고학을 하기를 바랬어. 고향 가서 호남고고학을 하라는 뜻이었겠지. 그걸 거부했으니, 그 양반 성정에 어떻겠어?"

 

이렇게 해서 그는 임효재와 더불어 2년 무급 조교생활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사무실에서 한다.

 

 

참 희한한 사람이다. 그렇게 주변에서는 고고학을 하라 했지만 그는 그것을 끝내 거부하고 민속학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민속학이 좋더란다.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실장 재직시절, 그의 고고학 인생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고고학을 거부한다.

 

"난 단장이었을 뿐이고 실제 발굴은 서성훈 선생 지휘 하에 이영문 성낙준 조현종 이런 친구들이 다 했어. 난 얼굴만 가끔 비쳤어."

 

그의 성정을 아는 사람들은 새빨간 거짓임을 안다.

 

(2017.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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