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 상, 고구려 벽화를 그리다]
<푸른 산호초>의 마쓰다 세이코나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 유튜브로 유명해진 마쓰다 아키히로 같은 이들이 있어서,
소나무 송松자에 밭 전田자를 쓰는 '마쓰다松田'가 일본 성인 건 요즘 잘 알려졌지 싶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 중에도 '마쓰다' 아무개는 적잖이 있었다.
개중 마쓰다 레이코松田黎光(1898~1941)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화가였다.
레이코는 호號고 이름은 마사오라고 하는데, 호를 이름처럼 썼던 모양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경성에 한 20년 넘게 살면서 주로 조선 풍속이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시리즈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앞 그림도 그런 시리즈 중 하나다.
평안남도 용강에 있는 고구려 고분 쌍영총(쌍기둥무덤) 벽화 한 부분을 그렸는데, '모사'라고는 했지만 그대로 본떴다기보단 자기 스타일을 가미해 재해석했다.
땡땡이 무늬 긴 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두 손을 곱게 모은 고구려 젊은이 둘을 스케치하듯 빠르게 묘사해냈다.
바탕은 어두운 회색인데, 단색조가 아니라 얼룩덜룩하게 처리해 실제 벽화를 보는 느낌마저 살짝 자아낸다.
유의할 점은 이 게 그린 게 아니라 찍은 것, 곧 판화라는 사실이다.
그냥 슥 보면 판화인지 모를 정도로 퍽 생생한데, 실제 마쓰츠다 레이코의 장기가 우키요에 같은 판화였다 한다.
일본인이 고구려벽화를 따라 그렸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르겠다.
하지만 1910~30년대 이른바 낙랑 붐, 고구려 붐이 일본 문화계에 일었던 걸 알면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이는 새롭게 나타나는 유물로 축적되던 정보, 그네들의 이국취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고조되던 옛 고구려에 대한 관심(고구려야말로 "선만일여"를 실천한 나라라고 평가했다나) 등이 뒤섞인 결과로,
연구용 벽화 모사도는 젖혀두고라도 창작 회화나 공예 등에 고구려'풍'이 들어가는 사례는 셀 수가 없다.
이것도 마쓰다 상이 그런 시대 분위기 아래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editor's note ***
松田는 일본어 발음을 존중하면 마츠다가 더 가깝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마쓰다다.
'探古의 일필휘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념품이 된 피양 명물](1) 대동강 벼루 JBBK? (4) | 2024.11.11 |
---|---|
부인이 집안에선 내상內相 (1) | 2024.11.04 |
겨울 고갯마루 우뚝한 소나무 한 그루 (0) | 2024.10.30 |
밀양 영남루에 을축년에 세운 일본식 밀양박씨 중시조비 (2) | 2024.10.28 |
저 놈을 '풍덩'하지 않고 뭐하는 게야 (3) | 2024.10.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