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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墓와 廟] (2) 종묘가 없어 성묘省墓를 택한 고려 현종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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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서 무덤에 봉분이 등장함으로써 조상 추숭 의례는 종래 그 혼령인 신주를 모신 종묘(집안으로 좁히면 가묘家廟) 말고도, 그 후손이 무덤에 직접 가서 제사를 올리는 능행陵行도 생기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따라서 봉분의 출현은 廟에서 墓로 조상 추숭 의식이 이동(혹은 병행)했음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성묘省墓



자, 이런 내 말을 단칼에 증명하는 대목이 있다. 《고려사절요》 권제3권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갑인 5년(1014) 여름 4월 조 대목이다.


“왕이 친히 재방齋坊에 체제禘祭하고 (선대왕과 그 부인들에게) 존시尊諡를 더 올렸다. 당시에 대묘大廟가 완성되지 못하여 매양 시제時祭가 되면 각기 해당 능陵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가 이제 재방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비로소 (바로 앞선 왕인) 목종을 부묘하고, 유배 죄 이하에 해당하는 죄수들을 사면했다.”

親禘于齋坊,加上尊諡,時大廟未成,每値時祭,各於本陵,遣官行事,令修齋坊,權安神主,始以穆宗祔,赦流罪以下。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조금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일이 있기 직전,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당하고, 왕 자신은 호남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궁궐이 불타고 태묘(종묘)도 소각됐다.
 

종묘宗廟.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환궁한 현종은 당연히 궁실 재건에 나섰다. 궁궐을 다시 짓고 그 일종인 태묘도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공사는 시일이 걸리므로, 그때까지 임시로 큰 행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태묘가 완성되기까지 그것을 대신할 공간이 있어야 하므로, 그 임시 공간을 제방齋坊이라 했다.

하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 임시 건물에서 사시사철 제사를 드리는다는 것이 영 가오가 상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써, 제사를 받을 선대왕과 그 정비들은 관원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관원이 대신갔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왕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었다.

왕이 직접 가지 못한 이유는 빤하다. 정국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많은 무덤을 어찌 왕이 일일이 돌아본단 말인가?
 

서원 제향



墓, 혹은 그 일종인 陵이 廟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처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은 드물다. 《절요》를 읽다가 한 줄 긁적거려둔다.


***


한 줄 한 줄 허심하게 넘길 대목이 없다. 내가 기록을 볼 때 언제나 명심하려 하는 점은 이것이 무슨 뜻이냐가 아니다. 왜 기록자는 이 기록을 남겨야 했는가다.

왜 이 친구는 허구 많은 사건 중에서 유독 이 기록을 선택해서 남겼을까?

why가 중요하지 그 외는 우수마발이다.
 
(201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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