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분封墳(mound)의 등장》
동아시아 세계에서 무덤에 완연한 봉분을 쓰기는 공자 시대에 비로소 시작한다. 이건 고고학 성과로 볼 때도 명백하다. 이른바 고총고분高塚古墳의 등장이 모조리 공자 이후다.
이걸 고고학에서는 권력자의 등장,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지표로 보는 견해가 압도적이나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조상신 숭배의 패턴이 변화한데 지나지 않는다.
봉분이란 무엇인가? 표식이다. 공자 이전 무덤은 묘墓다. 초두[艹]를 부수자로 쓴 데서 보듯 봉분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있는둥 마는둥했다.
《예기》인가 어디에 공자의 말로써 보이지 않는가? 공자는 지 애비 무덤이 어딘 줄도 몰랐다. 분墳이 아니라 墓였기 때문이다.
겨우 애비 무덤 찾아내곤 비로소 봉분을 만드니 이렇게 해서 고총고분은 비로소 탄생한다.
그렇다면 봉분의 탄생은 어떤 변화를 불렀는가? 묘廟에서 묘墓, 혹은 묘廟에서 분墳으로의 이동을 초래했다.
廟란 무엇인가? 신주神主다. 신주는 시체를 혼령에서 분리한 공간이다. 神體를 안치한 공간이 바로 廟다.
공자 이전 無봉분 시대엔 능행陵行이 필요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지 애비 할배 무덤이 어딘줄도 모르는데 어딜 가서 찾는단 말인가? 갑골문 봐라. 지 애비 무덤 찾아갔다는 흔적 본 적 있는가? 모조리 종묘에서 거북이 껍데기 좍 벗겨놓고 제사한 기록밖에 없다.
물론 안양安養 은허殷墟 부호묘婦好墓 발굴이 보여주듯이 없는 봉분 위에는 능상陵上 건축이 있어 그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은 있다. 하지만 조상 숭배 근간은 廟다.
봉분의 등장은 후손에겐 또 하나의 짐을 지운다. 조선시대 왕들은 이중 삼중 사중고에 후달렸다. 종묘서 제사하지 또 능까지 행차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시체와 유리한 무수한 신체神體가 있었으니, 초상화도 바로 신주의 대용물이라 이 초상화를 봉안한 공간 역시 종묘의 일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잘 뵈지 않지만, 고려시대를 보면 왕건은 조각을 만들어 곳곳에 봉안했으니 이것이 바로 종묘다. 그래서 전쟁 나면 가장 먼저 한 일이 왕건 초상화와 조각을 등짐처럼 지고 나르는 일이었다.
고려시대는 좀 더 독특해 왕건은 무덤에 봉안한 관 자체를 들고 튀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렇게 왕건 관을 들고 튄 기록이 네번인가 보인다.
고총고분의 등장은 권력자의 등장 지표와는 눈꼽만큼도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새빨간 거짓말들이다. 이영표 헛다리짚기에 지나지 않는다.
봉분의 등장은 무덤을 둘러싼 각종 제의용 공간의 발달을 불러온다. 이른바 침전寢殿으로 대표하는 공간들이 그것이다. 나아가 중국사를 보면 고총고분의 등장은 진한시대가 되면 아예 황제 무덤을 둘러싸고 신도시 건설이 등장한다. 이른바 능시陵市라는 괴물들이 그것이다.
이는 무덤이 제행 공간으로 발전한 우뚝한 증좌다.
한국사를 보면 고인돌이 표지적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 무수한 고인돌을 중심으로 일종의 묘제가 간단없이 행해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왜인가? 표식을 간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인돌이 사라지면서 목관묘로 대치된다. 이 목관묘는 일부 봉분 흔적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있는둥마는둥이다.
그러다가 목관묘 단계에 접어들면서 우람한 봉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권력자 탄생의 지표?
개소리들 하지 마라. 문화의 변화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가 변했기 때문이다.
첫째, 후장厚葬 풍습이 일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바리바리 무덤속으로 생전의 富를 가져가기 시작했고
둘째, 그에 따라 신라 기준이긴 하나 부곽副槨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나중에 별도 논고로 제출할 예정이긴 하나, 결론을 말한다면 부곽은 순전히 부의품 전용 공간이다.
부의품이 무엇인가?
조문객들이 낸 조의품들이다.
셋째, 더불어 종묘 중심에서 무덤으로 제의공간의 무게중심이 이동(혹은 병행)함에 따라 종래의 墓라는 말은 이제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옷을 입으니 그것이 바로 능역陵域으로 변화한 것이다.
종래 묘란 특정한 주검 무덤 장치였지만, 봉분 등장 이후 墓는 그런 무덤을 중심으로 포진하는 영역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를 겪은 것이다. 이에서 바로 가족 혹은 종족 공동묘지가 등장한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일단 마무리한다. 봉분의 등장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것을 정치권력 혹은 국가권력 변화와 연동시키는 일이 일견 타당할 수 있지만, 더 넓게 봐야 한다.
고고학? 별건 줄 아는가? 내가 보는 고고학은 이것이 인문학이다. 토기? 철기? 나한텐 그건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November 17, 2017 ·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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