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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撰, 역주나 번역은 저술이요 창작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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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撰(찬)'이라는 말은 편찬한다, 저술하다는 뜻이다. 동한東漢시대 문자학도 허신(許慎)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 글자를 수록하면서 풀기를 "오로지 가르치는 것이다. 말씀[言]이 뜻이고, 巽이 소리인 형성자다[專教也. 从言巽聲]"라고 했거니와, 이를 통해 허신 시대에 통용한 이 글자 일반적인 의미가 교수敎授에 있었음을 본다. 


내 서가 한 켠의 중국 고전 번역 혹은 역주 코너. 撰을 바라보는 중국 지식인 사회 시각을 엿보게 한다.



글을 쓰거나 짓는 일을 흔히 '撰述(찬술)'이라 하거니와, 이 합성어다가 등장한 시점은 정확히 추적하기는 힘드나, 아주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 우리한테 통용하는 관념에 의하면, 撰은 문학작품으로 볼지면 이른바 순수창작을 말한다. 


하지만 전통시대 撰이라는 말이 고래로 자기 작품이 아닌 남의 작품을 편집하거나, 혹은 그것을 주석注釋하거나, 나아가 현대어 혹은 다른 문화권 말로 번역하는 일에도 쓰였다. 이런 전통이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엿보인다.


중국 위진남북조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자기집을 드나드는 문사들과 함께 묶은 방대한 역대 중국 시문 엔솔로지 《문선文選》을 보면, 판본에 따라 '蕭統 撰(소통찬)'이라 적은 일이 많거니와, 이를 보건대 《문선》처럼 순수 창작이 아닌 자료 편집 정리에도 당당히 '찬撰'이라는 말을 썼음을 본다. 


순자에 대한 역대 주석 모음집인 순자집해荀子集解에다가 그 찬자撰者 왕선겸王先謙의 작업을 중화서국은 撰이라 했다, 법언法言에 대한 비슷한 작업도 왕영보汪榮寶 撰이라 했다.



우리 지식인 사회에선 주석이나 번역 같은 작업에다가 '찬'이라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본 적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다만 중국이나 일본을 보면 이 경우 당당히 그 역주자가 편찬자 혹은 창작자로 당당히 서는 일이 많음을 본다. 


나는 이것이 번역 역주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아직 낮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이 분야 종사자들 스스로도 과감히 저런 결과물은 좀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撰'이라는 말을 써서 창작물화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데 내가 《논어》 역주를 내고 그 제목을 《역주 논어》라 붙였다고 하자. 이건 내 작품 내 창작물인가, 아닌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역주는 내 작품이며, 그 결과물은 내 창작물이다. 이럴 때는 당당히 '김태식 저著 《역주 논어》'라 하거나, 김태식 撰 《역주 논어》'라 해야 한다. 그리 당당히 내세워야 한다. 


함에도 우리는 통상 이런 성과물에 저자나 창작자를 바로 내세우지 못하고 굳이 '원저자 누구, 역주 누구'라 해서 스스로 깎아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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