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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王조차 읽지 않은 독자 제로, 어람용 의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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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논란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 사이에서도 의궤(儀軌)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제법 쏟아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2000년대 접어들어서는 이에 천착한 제법 묵직한 전문 연구서적으로 나왔는가 하면, 이른바 일반 대중 독자를 겨냥한 비교적 가벼운 형식의 단행본도 시중에 더러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의궤란 무엇인가? 내가 이 자리에서 그것을 논할 처지는 아니며, 다만 이 자리에서는 최근 외규장각 도서의 이관(移管)과 관련해 의례를 논할 때면 항용 통용되는 말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고자 할 따름이다. 


Royal Protocol on Presenting Eulogic to the Royal Family.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888년 조선시대. 철장책(鐵裝冊). 고종과 민비 등 왕실 주요 인물들에게 존호를 받치면서 그 행사를 기록한 어람용 의궤다. 녹색 명주 표지에 놋쇠로 편철한 철장 장식이다. 못이 빠지지 않도록 부착한 다섯 개 국화동(菊花童) 중 가운데 것에 둥근 고리를 달았다. 국립고궁박물관이 2008년 개최한 장황(표구) 특별전에 출품됐다. 2008.9.2 taeshik@yna.co.kr



이 분야 직업적 학문 종사자들이 이르기를, 특히 외규장각 의궤류를 논할 적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그에는 어람용(御覽用)이 많고 유일본이 많아 특히 가치가 높으며, 임금님이 보시는 의궤이기에 그 시대 문화의 총화라 한다.


묻는다.


임금님이 보신 판본이라 해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함은 무슨 뜻이며,

그렇기에 그 시대 문화의 총화라 함은 또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 시대 한양 시장거리, 농촌 어느 무두쟁이가 만든 가죽신은 그 시대 문화의 총화가 아니며, 가치가 특히 낮은 것인가? 


<경종국장도감의궤> 한 장면



이른바 御覽用이 종이 재질이 더 고급이고, 글씨도 크고, 그림도 좋고, 비단 장정도 그렇지 않은 이른바 분상용에 견주어 여러 모로 ‘비싼 자재’를 사용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 한 장면



하지만 이 시점에서 심각히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가독성의 문제이다.


儀軌는 독자가 누구인가? 

御覽用은 글자 그대로 오직 독자가 王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분상용 또한 그 독자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적에 유관 기관이나 관리들이 수시로 그것을 대출해 참고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가독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御覽用의 보존상태가 같은 혹은 비슷한 시대에 생산된 다른 의궤류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자재를 썼기 때문이라 하거니와, 실제 그러한가?


실제로도 어람용이 보존상태가 대체로 좋다고 해도 大過가 없다. 하지만 그 원인이 좋은 자재를 사용한 데서 말미암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왜 어람용은 보존상태가 어람용이 아닌 의궤에 비해 좋은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이 가독성의 문제, 즉, 독자가 누구인가로 귀결한다.


<성상태실가봉석란간조배의궤> 한 장면



어람용 의궤.


이건 냉혹히 평가하자면, 만들어지는 그 순간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독자를 갖지 못한 죽은 텍스트다. 저것이 어람용이라 하지만, 저 어람용을 제작한 시대의 왕들조차 저들 어람용 의궤를 보았을까? 내 단언커니와 단 한 명도 읽은 왕이 없다.


독자가 단 한 명도 없는 텍스트가 바로 어람용 의궤다. 王이 할 일이 그렇게 없어 어람용 의궤나 들어다 보고 자빠졌겠는가? 어람용 의궤가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그것을 펼쳐 본 놈이 한 놈도 없기 때문이다. 독자를 전혀 갖지 못한 어람용 의궤.


자, 그러함에도 어람용이라 해서 그것이 문화적 가치가 더 뛰어나다 할 수 있는가? 


내 보기엔 독자를 더 갖췄다는 점에서 분상용이야말로 더욱 가치 있는 유산이라 할지니...(2011.07.04 17: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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