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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自述] 돈 끌어와 개최한 고구려 고분벽화 학술대회

by taeshik.kim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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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연갑수 형이 보인다.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따로 놀기 마련이라, 좋은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 꼬이는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회 개최와 관련해 주최한 학술대회가 그러했으니,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연합뉴스가 일본 교도통신, 한국의 서울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2006. 9. 2∼10. 22)을 개최했거니와, 이 전시회는 현재까지 나로서는 내가 직접 간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였으니,

이후에도 간접으로 회사 주최 전시회에는 이런저런 식으로 손을 대기는 했지만 다 간접이었으나, 이 전시만큼은 내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이 전시회 관련 논급은 여러 군데 했으니, 중복을 피하기로 하고 이 전시회를 막상 개막하고 나니 뭔가 하나 허전한 게 있었으니, 관련 학술대회였다. 

이런 학술대회는 내가 준비 단계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판에 박힌 그런 자리가 싫었고, 그래서 일부러 알면서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대회가 개막하고, 또,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이 분위기를 밀고 나갈 필요도 있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아 학술대회 하나 해야겠구나 해서 긴급히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 학술대회는 간단히 말해서 내가 혼자서 기획해 혼자서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애초 생각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관련 예산이 책정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중간에 이런 자리를 하자 하니, 우리 공장 업무 파트에서 가뜩이나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그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답하기를 그렇담 내가 돈을 끌어와서 할 테니 그리 알라 했던 것이니, 돈이 지출되지 않는다니 그쪽에서도 말릴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 추진하게 되었다.

문제는 예산. 대략 추산해 보니, 발표비 토론비 제반 경비 해서 천만 원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에 도달했다.

실제 그 정도가 들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에 없지마는, 그 짧은 기간에 이곳저곳 부탁해서 빠듯한 예산을 내가 끌어왔다. 그때는 발굴조사단 사정이 그런 대로 괜찮을 때고 해서 그쪽에다가 주로 부탁을 해서 성사한 것으로 기억한다. 

뭐 듣기에 따라 거북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아가 그땐 내 말이 곧 법으로 통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데 문제는 또 있었으니, 그런 후원금을 끌어오기는 했는데 회계 처리가 문제였다. 기부금 처리? 비슷하게 해야 했는데, 이걸 내가 개인으로 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같으면야 무슨 학술단체, 예컨대 그때 내가 한창 간여한 신라사학회 같은 데를 끼고 들어왔으면 되었겠지만,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할 수 없이 회사가 받아서 처리하는 것으로 했다.

이렇게 되니 또 문제가 생겼다. 한 번 들어간 돈이 나올 줄 몰랐다. 분명 내가 끌어다 준 돈인데 일단 회사 통장으로 들어간 돈을 빼내 오려는데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끌어온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지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암튼 어케 해서 겨우 하기로 했다.

다음 문제는 발표자 토론자 섭외. 순식간에 해치워야겠기에 일정을 맞추기도 쉽지는 않았지만 이건 내 주특기라 하루이틀 만에 해치웠다.

일본 쪽에서는 도쿄대학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교수를 섭외했는데 다행히 금새 발표진에 넣기로 협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술대회는 대회 개막 대략 한달쯤 지난 뒤인 10월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고구려문화와 고분벽화'를 주제로 열었다. 

강우방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의 여러 문제'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논문 4편 발표와 그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울산대 전호태 교수는 고구려 벽화고분 중 하나로, 묻힌 주인공이 고구려왕인지, 아니면 중국계 고구려 귀화인인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안악3호분의 피장자 문제를 다시 고찰했고, 사오토메 교수는 고건축학자이자 고미술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조선 고적古跡 조사활동을 살폈다.

당시 동북아역사재단에 재직 중인 김일권 박사는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德花里) 봉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구려 석실 봉토분들인 덕화리 1ㆍ2호분에 나타난 별자리 그림을 분석하면서 고구려인들이 생각한 소우주를 조명하고, 나아가 이를 천문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고, 숙명여대 박아림 교수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중국의 고분미술의 상관관계를 고찰했다.

박아림은 전호태 교수가 추천해서 초빙했으며, 나머지는 급한 대로 내가 짜서 넣었으니, 이른바 김태식계로 분류하는 사람들로 짰다. 왜? 그래야 내가 편하지 않겠는가? 

이 일은 여러 모로 나로선 회계 처리의 중요성을 일깨운 인연이 되었다.

이후 문헌과문물이라는 모임을 만들면서 이런 경험은 중요하게 작동해서, 마침 서영일 형이 그렇게 제안하기도 해서 문문은 아예 법인으로 등록해 버렸다.

국내 학술 단체 중에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미술사학회 정도가 사단법인이었고 고고학회도 임의단체인 시절이라, 나는 가장 먼저 앞서 나갔기에 나는 임의단체로 남아 세금도 내지 않는 저들을 성토할 근거를 마련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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