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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自述] 세 가지 회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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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자가 되고 나서 초창기에 나름대로 정열을 쏟은 분야가 있으니 이른바 전후청산 관련 문제가 그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나는 원폭피해 문제와 시베리아 삭풍회, 그리고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주력해 그때 그 당시에는 이를 life work로 삼고자 하는 욕망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일전에 내가 어떤 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듯이 이런 열망은 한 사건으로 완전히 내 뇌리에서 지워버리기로 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위안부 문제에 직면한 일본정부가 아시아평화기금이라는 걸 맹글었으니, 이 사태에 대응하는 국내 관련단체, 아직은 그 실명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행태에 실망을 거듭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짚을 문제가 있다. 첫째 이른바 역사학계가 대표하는 학계와 둘째 동료 언론의 문제였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좋은 자료를 발굴하고 좋은 증언을 채록하고 기사화해도 먼산의 메아리였을 뿐이거니와, 위안부 문제를 제외하고는 학계에 자문을 구하려 해도 구할 놈이 없었다.

보라, 어떤 놈이 원폭 문제를 안다더냐?

보라, 어떤 놈이 삭풍회를 안다더냐?

요즘은 사정이 나아졌을래나?

그래도 막상 이런 문제를 건딜어 놓으면, 그리고 그에서 조금이라도 오류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그네들이 하는 말이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지"라고 한다.

장담하거니와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놈이 없었노라.

이하는 기억에 의존하므로 일부 오류가 있을 수가 있다.


회한의 제1 김순길

김순길은 징용노무자 원폭피해자다. 부산 남구 대연동에 살았는데 일제말인 1945년 1월에 노무자로 징용되어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의 피해자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일본정부에 대해 원폭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기나긴 법정투쟁을 전개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징용일기가 있었는데, 이 징용일기를 1993년에 접하고는 내가 그것을 책으로 내겠다고 하다가 흐지부지되었거니와, 이후 이 일기는 나가사키 원폭피해전시관에 기증되었으며, 그것이 근자에 책자로 국내에도 발간되었다고 들었다.

그것을 내가 정리하지 못한 일이 심히 지금도 걸린다.





회환의 제2 삭풍회

시베리아 삭풍회는 인천을 기반으로 하는 일제말 관동군 징집 피해자들의 모임이다. 90년대 중반, 나는 이쪽 생존자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들은 팜플렛 같은 걸 발간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가 바로 이런 관동군 징집자들의 직접 유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동완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내 세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번역본의 절대 다수가 바로 이 사람 역본인데, 그가 바로 한국외대 교수로 관동군 출신이다.

삭풍회와 접촉하던 시절, 이 동완 교수를 접촉해 그 증언을 따고자 한다고 하다가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생각나서 그와 접촉을 시도했더니, 한달 전에 사망했다고는 소식을 들었다.

삭풍회 회원들은 그 즈음 내가 모조리 증언을 따서 책자로 만들어내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그러지를 못했으니 회환으로 남는다.



1944년 미얀마 전선의 영국군




회환의 제3 이가형

이가형이란 이름 역시 내 세대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영미 문학이나 불란스문학 번역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그의 번역으로 읽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독특해 동경제국대학 출신으로 내가 기억한다.

불문학과 영문학 두 가지를 전공했으니, 오래도록 국민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일제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버마 전선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런 이력을 말년에 '분노의 강'이라는 자전소설로 냈다.

애초에 이는 삼부작으로 기획했지만 제1만 나오고 만 것으로 안다.

나는 이런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강만길 교수 논문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강 교수께 이가형 교수를 만나보았느냐 여쭈었더니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참말로 의아했던 것이 이 정도 인물이면 직접 증언을 따봄직했는데 강 교수를 포함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소설에는 이른바 포로감시원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위안소를 직접 찾은 경험, 그리고 귀국길에 싱가포르인지 어디의 포로수용소에서 한글신문을 발간한 일 등등이 등장한다.

참말로 흥미진진한데, 그것을 보고는 내가 직접 이가형 교수를 찾았다.

당시에 이미 국민대를 은퇴한 그를 시내 중심 어느 지하철 교차역 구내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거기에서 만났는데, 당시에 이미 그는 몸이 불편했다.

오래사시지는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몇년 뒤에 타계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그 이튿날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되었는데 빌어먹을..

당시 기사가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지 않아 사라졌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뚜렷이 기억하는 대목은 "위안소에 직접 가셨지요?"라는 물음에 선생은 아무런 말을 않으시고 웃기만 하셨다는 점이다.

그는 위안소를 갔다.

이날 만남은 워낙 짧았으니, 그때 나는 이 분을 충분히 인터뷰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리라 했거만 그러지 못하고 이미 그분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201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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