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익숙한 여관이 요즘은 모조리 모텔이라는 이름으로 변모했다. 개중에는 호텔도 있는 듯하다. 여인숙, 여관이라는 간판은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리가 신촌에서 막 생활하기 시작한 무렵, 신촌과 안암골에는 양대 걸물이 화제였다. 안암골에서는 까까머리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여자란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노상 구멍 얘기만 했고, 신촌에서는 마광수라는 이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마광수 수업은 딱 한 번 청강했다. 200명은 너끈히 수용할 종합관 교양수업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수업시간 내내 담배를 꼬나물고 하는 말이라고는 x지 x지밖에 없었다. 나는 마광수에게서 얻은 것이 없었다.
그가 말한 장미여관은 신촌의 실제 여관이다. 나도 그 시절에 장미여관을 가본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한데 우리가 정작으로 애용한 곳은 그 인근 올림픽여관이라는 곳이었다.
요새야 야동이라는 게 어디서건 접속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는 이 여관이 제격이었다. 사내놈 몇 놈이 돈 모아 올림픽여관으로 기어들어가 밤새 야동을 관람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상이 2013년 11년 5월 내 글이며 아래는 올림픽여관 동기 공수호가 부친 대목이라, 원문엔 실명이 마구잡이로 거론되어 익명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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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여관 옆이 일동장여관, 그 옆이 금수장여관이었지만, 우린 항상 올림픽여관을 애용했다. 방값 흥정은 주로 강XX가 했고, 투숙객 명부는 유XX가 작성했다. 우리는 항상 그 착하디 착한 영문과 XXX 교수 이름을 숙박부에 기재했다. 이유는 모른다.
XXX 교수 딸이 바로 우리 동기였고, 지금은 XXX 상무인 XXX다.
당시 올림픽여관 야동은 우리에겐 마징가 제트 이후 최대의 꿈이었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그렇다. 마광수 교수는 아직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 전이었다.
그는 핍박 받고 있었고, 탄압받고 있었다. 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단군 이래 최초의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린 그를 선지자로 칭송한다. 돌이켜 보면 당연한 선언이었지만, 8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선언은 콜럼부스의 달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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