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강동6주는 그 용어가 탁상에서 안출한 용어이기는 해도 10~11세기 고려-거란 관계를 설명하는 데 여러 모로 요긴하다는 이야기는 했거니와, 저 용어를 만들어낸 개념이 거란 전사인 요사遼史와 고려사 모두 등장한다는 사실도 이미 지적했거니와, 이를 위해 바로 앞에서 우리는 6주六州라는 이름으로 요사에 등장하는 맥락들을 살핀 바 있다.
이 자리에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 측 문헌(실상 정리는 조선초지만)을 본다. 기전체인 전자보다는 편년체인 절요가 여러 모로 이 경우 요긴해 이 절요를 통해 그에 해당하는 고려 측 표현인 육성六城이 등장하는 맥락을 등장 순서대로 살핀다.
먼저 현종 3년, 1012년 6월에 이르기를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에 보내어 여름철 문후를 올리고 또한 왕이 병에 걸려 친히 조회하러 올 수가 없었다고 아뢰게 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분노하여 흥화성興化城·통주성通州城·용주성龍州城·철주성鐵州城·곽주성郭州城·구주성龜州城 등 6개의 성을 차지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놀랍게도 이 대목이 이른바 강동6주 실체가 등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때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이 끝나고 양국이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시기거니와, 그런 시기에 거란이 현종의 친조親朝를 구실로, 고려가 그것이 실행하지 않음을 꾸짖으며 6성으로 도로 가져가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이 친조 문제는 강조의 변을 구실로 그 타도를 외치며 고려를 침공한 거란이 개경까지 불태우고서는 철군하면서 내건 철군 조건인양 선전되고, 실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그리 몰아가고 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 점은 나중에 따로 살핀다.
이어 이듬해에도 거란은 갖은 요구로 고려를 협박한다.
현종 4년, 1013년 3월에는 거란이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을 보내서 앞서 열기한 흥화성興化城 등 6개 성을 책취責取]했다 한다. 책취라는 책망하며 취한다는 뜻이다.
이런 요구는 같은해 7월에도 반복되는데, 야율행평耶律行平이 다시 와서 6개 성을 돌려달라 요구했다고 한다.
같은 요구가 이듬해 현종 5년, 1014년 9월에도 있게 되는데, 이번에는 거란이 장군將軍 이송무李松茂를 보내어 또다시 6개 성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저 해, 곧 1014년 겨울 10월에는 거란이 국구國舅 상온詳穩 소적렬蕭敵烈을 사령관 삼아 통주通州의 흥화진興化鎭을 침략하니,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別將 주연周演이 그들을 공격하여 700여 급을 베서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도 많아 하니, 수변에서 대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앞서 나는 흥화진 같은 진鎭이 그 상위 지방행정구역인 주州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자문한 바 있거니와, 이를 보면 흥화진이 명확히 통주에 소속됐음을 본다. 통주에는 그 전방기지 사령관 겸 행정관인 방어사防禦使가 파견되어(혹은 중앙에서 겸직) 있었을 것이며, 흥화진에는 그 우두머리 사령관 겸 행정관으로 진사鎭使가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전투에서 정신용이 흥화진사를 겸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거란의 6성 요구는 다시 그 이듬해인 현종 6년, 1015년 9월에도 있게 되는데, 이때는 거란 쪽에서 사신으로 감문장군監門將軍 이송무李松茂가 다시 와서 이렇게 요구했다 한다. 이송무는 그 전해에 다녀간 바 있다.
이때 요구는 이상한 점이 있는데, 사신을 보냄과 동시에 거란은 같은 달 9월 12일 기미에 통주通州를 공격하고는 흥화진興化鎭 대장군大將軍 정신용鄭神勇과 별장別將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이 거란 수급 700여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나 저들 6명은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이어 같은 달 9월 20일 정묘에는 거란이 영주성寧州城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하는 일이 있었다. 대장군大將軍 고적여高積餘와 장군將軍 소충현蘇忠玄·고연적高延迪, 산원散員 김기金己, 별장別將 광참光參이 추격하다 전사하고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는 사로잡혀 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고려군 피해 역시 막대했다.
이 두 지역 전투는 그 전해 전투와 더불어 거란이 전면전이 아니라 비교적 소규모 군대로 특정 지역, 이른바 강동육주 공략에 나선 신호탄을 보여준다.
시기를 특정하지 않은 1015년에는 거란이 선화진宣化鎭과 정원진定遠鎭 두 곳을 취하고는 성을 쌓았다 했는데, 후자는 위치를 추적할 만한 단서가 없는 반면 전자 선화진은 훗날 윤관이 개척한 이른바 9성 중 하나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렇다면 강동육주 방면이 아니라 여진이 웅거하는 함경도 쪽이 아닌가 하는데, 이 대목을 어찌 봐야 하는지 아리송송하다.
거란의 공세는 멈추지 않아 1016년 1월 5일 경술에는 야율세랑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이 이끄는 거란군이 곽주郭州를 침략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에서 고려군은 수만 명이 전사했다고 하고 거란은 치중輜重을 노획하여 싣고 돌아갔다 하는 것으로 보아 혹 이때 곽주성이 함락 혹은 그에 가까운 피해를 보지 않았나 한다.
그런 가운데 같은 달 1월 9일 갑인에는 거란이 사신 10인을 보냈지만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고려는 아예 국경에 들이지도 않고 쫓아내 버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또 다른 전면전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악화한 관계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 1018~19년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며, 이를 통해 양국 관계는 비로소 새로운 단계로 돌입한다.
강감찬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한 획기였다.
고려는 저와 같은 거란 측 공세, 곧 이른바 강동6주를 돌려달라는 협박과 그에 동반하는 각종 군사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버텨냈으니, 이 와중에 서희가 담판을 벌이고는 헌신짝처럼 버린 송宋을 다시 찾아가 연합을 제안하게 된다.
이른바 강동육주는 고려로서는 종주국을 버리고 그 반대급부로 쟁취한 땅이며 거란으로서는 그 반대급부로 황제가 시혜를 베풀어 고려에 준 땅이라는 두 개의 서로 합치할 수 없는 논리가 충돌하는 표상이자 전쟁터였다.
고려로서는 저 땅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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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육주를 심판한다] (3) 요사遼史가 말하는 육주六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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